사진; 한때 실리콘밸리 사람들의 집합장소로 지역경제 번영의 표상이었던 레스토랑 벅스는 이제 한적한 모습마저 보이고 있다.
“실리콘밸리가 호황을 누리던 지난 2000년만 해도 빈자리가 없어 30분 정도는 기다리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언제와도 앉을 수 있게 됐다.”
우드사이드에 있는 레스토랑 ‘벅스’에서 만난 보안소프트웨어 업체 아크사이트의 마케팅 담당 래리 루네트 부사장은 기자를 기다리게 할 수 없어 약속보다 빨리 나왔는데 “너무 일렀다(too early)”며 가볍게 웃었다.
벅스는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리스트는 물론 엔지니어들이 모임을 갖고 각종 정보를 교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지역 경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소다. 점심식사 시간이 다 돼 가는데에도 불구하고 간간이 빈자리가 보였다. 하지만 닷컴 붐이 일던 2000년 여기는 100평 넘는 공간에 빈 테이블이 없어 찾아오는 손님들을 오랜 시간 기다리게 하기도 했던 명소였다.
루네트 부사장은 “지난해 이 지역 벤처캐피털들의 투자가 곤두박질치면서 기업의 3분의 1은 물갈이 됐을 것”이라며 “벅스에서 만나던 사람들 가운데 절반은 얼굴이 바뀌었다”고 밝힌다. 이어 “당시에는 기쁜 마음으로 줄을 섰지만 지금은 바로 앉을 수 있어도 마음은 편치 않다”고 덧붙였다. 음식을 나르던 벅스의 종업원 역시 “손님의 수가 상당히 줄어들었다”며 “특히 중국·인도 등 외국인들을 보기 힘들어졌다”고 박자를 맞췄다.
루네트 부사장은 “지난해 이 지역에서 파산한 인터넷 기업 수는 2000년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했다”며 “더 이상의 파산은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리콘밸리 경기가 나아지고 있다기보다는 “망할 기업은 이제 어느 정도 망했다”는 말처럼 들렸다.
밸리 종사자들의 임금도 크게 하락했다. 지난 99년 밸리에 정착해 HP 등 컴퓨터 부문에 몸담아왔다는 인도인 슬레이시 비자할리는 “직종이나 직책에 따라 다르지만 5∼20%는 임금이 줄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실리콘밸리의 정보기술(IT) 기업 및 종사자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이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과 함께, 많지는 않지만 IT분야에서 새로운 사업영역들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실제 개발비 조달조차 힘든 상황에 직면한 업체들도 즐비하지만 사업영역을 제대로 확보했다고 평가받는 업체들도 있었다.
예를 들어 아크사이트는 지난 9·11 테러 후 각광을 받고 있는 보안전문업체로 보안소프트웨어 관리소프트웨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클라이너퍼킨스로부터 1000만달러에 가까운 자금을 유치했다.
지금 인터넷의 기초가 된 네트워크인 ARPA(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넷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주축이 된 네트워크 인프라 업체 캐스피언네트웍스가 1억달러를 넘어서는 투자를 유치했다. 휴대폰·PDA 등 단말기를 통합해 데이터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를 개발중인 줄라이시스템스도 400만달러를, 베트남인들이 주축이 된 통신용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세븐도 적지 않은 자금을 유치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단 이런 사례를 들지 않아도 실리콘밸리 종사자들이 피부로 느끼는 경기는 서서히 나아지고 있었다. 밸리 남북 관통도로인 ‘엘 카미노 레알’의 사무실 임대간판도 줄어들고 있었고 무엇보다 지난해 연말 6.5%까지 치솟았던 이 지역 실업률이 낮아졌다.
클라이너퍼킨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는 한 벤처캐피털리스트는 “돈이 닷컴 기업들을 외면할 수는 있었지만 IT 전체를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라면서 “늦어도 내년 초면 실리콘밸리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에서 읽히는 확신은 크지 않았다. 그 역시 이 지역 IT 기업들이 부진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2002년 6월,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이나 벤처캐피털리스트들 모두 ‘엉거주춤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실리콘밸리=허의원기자 ewhu@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