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 머무는 동안 이 지역 정보기술(IT) 부문 종사자들에게 들은 무수한 말은 결국 ‘불황이 오히려 약이 됐다’ ‘실리콘밸리 경기는 이미 바닥을 쳤고 올해 안에 회복세를 탈 것이다’ 등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한마디로 ‘더 이상의 경기침체는 없다’는 것이다.
이달 들어 미국 언론들은 위험요소는 잠재하지만 고용이 완만하게 나마 늘고 있으며 제조업 경기가 살아나는 등 자국 경제는 최악의 상황을 벗어났으며 1분기 이후 상승세를 타고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에서 그런 기미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이 지역 경기는 한동안 암흑을 빠져나오기 힘들 것처럼 보였다. 로렌스가에 있는 한 한국 식당의 주인은 “실리콘밸리에 정착한 지 10년 가까이 됐지만 요즘과 같은 불황은 처음”이라고 혀를 내두르면서 “직원들을 모두 내보내고 아르바이트생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바이오테크놀로지분야는 달랐지만 나노테크분야나 보안·무선 등 IT분야에서는 업체들의 강변에도 불구하고 ‘장밋빛 미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 지역 업체들은 대부분 낙관론을 앞세우고 있지만 확실한 데이터를 내놓지 못했다. ‘감’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인 동시에 그만큼 실리콘밸리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밸리의 미래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의 역할에 의지한 관성적 기대가 주를 이뤘다.
낙관론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특히 컸다. 새너제이 주립대학이 실리콘밸리 주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보고서에서 응답자의 64%는 ‘밸리의 경제여건이 앞으로 개선될 것’이라고 밝힌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3분의 1은 ‘경제사정이 악화됐다’고 답했고, 보고서조차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으나 아직은 현실화되지 못한 ‘희망’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실리콘밸리발 경기회복 신호는 접할 수 있을 것인가. 있다면 언제쯤일까. 이는 ‘실리콘밸리가 세계 IT산업의 메카 역할을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것과 같은 내용의 질문인 셈이다.
리버스톤네트웍스의 로뮬러스 페레이라 사장과 브로케이드 커뮤니케이션스 시스템스의 그레그 레이스 회장에게 공통적으로 정확한 실리콘밸리 경기회복 시점을 물었다.
페레이라 사장은 “IT산업이 빠르게 제궤도를 찾아가고 있다“며 “실리콘밸리는 물론 미국에서 ‘조만간’ IT붐이 불겠지만 이는 지난 2000년과는 다른 형태로 전개될 것”이라고 말했다. 레이스 회장은 “IT제품 구매가 ‘점차’ 늘고 있다”고 질문과는 동떨어진 답으로 일관했다.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어려운 고비를 넘어 ‘무에서 유를 창조해온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아닐 듯 싶었기 때문이었다.
표정을 살피던 볼케이드의 마이클 버드 최고운영책임자(COO)가 “실리콘밸리의 IT시장은 단기적으로 호황·불황을 탈 정도 규모에서 벗어났다”며 “밸리의 경기주기는 5∼10년 단위로 변화할 것”이라고 말해 미흡하나마 궁금증을 덜어주었다.
팰로알토에서 산타클라라에 이르기까지 길이 80마일, 너비 20마일에 해당하는 직사각형 형태의 작은 분지 실리콘밸리는 30여년 전만 해도 과수원이 대부분이었다. 문득 ‘살구와 호두가 열리던 비옥한 땅에서 ‘IT 과실’이 익어가는 것 역시 역사의 ‘작은 반복’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리콘밸리(미국)=허의원기자 ewh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