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억 산업기술부 부장대우 bekim@etnews.co.kr
과학기술인들은 요즘 어깨에 힘이 쭉 빠져 있다. 정부가 과학기술인의 사기를 올려주겠다며 각종 지원책을 내놓고 있지만 피부에 와 닿는 것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거보다 못한 처우를 받게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악화된 데는 정부의 오락가락하는 정책이 가장 큰 몫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청소년들이 이공계 진학을 기피하고 해외에서 유학한 유능한 과학기술 인재들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확산되자 부랴부랴 대책 수립에 나섰다.
정부는 청소년들의 이공계 진학을 활성화하기 위해 청소년 과학교육 내실화, 과학영재교육과 과학고 정상화, 이공계 진학제도 개선, 이공계 대학교육 제도 개선 및 발전, 청소년 과학화 촉진 등 다섯 가지 사업을 범부처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정부가 각종 대책을 내놨을 때 과학기술인들은 일부 환영을 표시하면서도 “과연 얼마나 오래 갈지 모르겠다”거나 “실효성 있는 대책인가” 하는 회의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우려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아 현실로 드러났다.
정부는 내년도 정부출연연의 예산을 실질적으로 올해 보다 더 적게 지원키로 방침을 정했다. 이 과정에서 과학 대중화와 청소년들의 과학의식 고취를 위해 일해온 과학재단의 기금운용예산을 회수해 버렸다. 이로 인해 과학재단은 과학올림피아드·과학영재교육센터 등 청소년들에게 꿈을 주던 사업을 추진하기 어렵게 됐다.
이번 일을 보면서 과연 행정부처에 과학기술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또 지금처럼 과학기술을 경시하는 분위기에서 장기적이고도 종합적인 과학기술 진흥대책이 나올 것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과학기술부가 추진하고 있는 나노팹사업도 마찬가지다.
과기부는 당초 지난 5월 나노팹 건설지역을 확정키로 했으나 ‘백년대계를 내다볼 신중한 선택’과 지자체 선거 등을 이유로 일정을 몇 차례나 연기하는 등 눈치보기에 급급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나노팹 문제는 지난 지자체장 선거에서 경기도와 대전 등에서 출마한 후보들이 선거공약으로 내걸 정도로 지역 산업체와 과학기술인의 관심을 끌고 있는 사업이다.
이 때문에 과기부는 여기저기 눈치를 보고 계속 미루는 등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기업과 대학·출연연이 서로 경쟁자로 만나면서 상호비방에 열을 올리는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데는 과기부에 대한 불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정부가 스스로 믿음을 주지 못하자 서로 목소리를 높여가며 밥그릇 싸움에 정신없게 된 것이다.
“정부의 정책이 흔들리면 민초들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불신만 양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기술계도 고질적인 병폐인 인맥·학맥 등에 따라 정책을 좌지우지하기보다 히딩크식의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을 기반으로 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과학계 원로의 이 말을 과학기술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당국자들은 가슴깊이 새겨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