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 좀머의 뒤를 이어 도이치텔레콤의 새 사령탑으로 취임한 헬무트 질러 CEO의 역할에 대해 유럽 통신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올해 72세의 고령으로 임기 6개월의 한시적 CEO로 취임한 그가 유럽 최대의 통신공룡기업인 도이치텔레콤의 경영을 위해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가 관심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질러는 지난 92년 화학업체인 헨켈의 회장직을 끝으로 경영일선에서 은퇴했던 인물이다. 물론 이후에도 그는 88∼89년 독일 화학산업협회 회장, 96∼2000년 도이치텔레콤 관리이사회 회장, 현 포르셰 관리이사회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독일 경제계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그가 기업의 일상경영에서 손을 뗀지 이미 10년이 넘었다는 점에서 그의 도이치텔레콤 CEO 취임배경을 놓고 설왕설래가 이어지고 있다.
대다수 분석가들은 질러 CEO 체제를 도이치텔레콤의 내분과정에서 발생한 과도적 경영체제로 보고 있다. 그간 좀머 전 CEO의 교체문제를 놓고 도이치텔레콤 주주와 직원대표, 그리고 독일정부 사이의 갈등은 상당했다. 주주들은 좀머의 무리한 확장정책으로 도이치텔레콤의 부채가 670억유로로 늘어나고 주가 또한 90% 이상 폭락했다며 그의 즉각적 경질과 외부인사 영입을 통한 대대적 경영개편을 요구했다.
반면 직원대표들은 그의 경질에 반대했으며, 설사 그를 경질하더라도 후임에는 내부인사가 기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정부는 절충적 방안으로 한편으로는 좀머의 사임을 종용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간 좀머를 지지했던 게르트 텐저 이사를 차기 CEO로 후원했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입장이 알려지자 도이치텔레콤의 주가가 하루치로는 사상 최대폭까지 하락하는 등 주주들의 반발이 거셌다.
9월 총선을 앞두고 도이치텔레콤 주주와 직원 모두를 다독거려야만 하는 독일정부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던 셈이다. 이에 따라 게르트 텐저를 부CEO로 승진시켜 경영의 실질적 축으로 삼는 대신 명망가인 헬무트 질러를 임기 6개월의 새 CEO로 임명해 시간을 두고 외부 CEO 영입문제를 검토한다는 절충안이 나왔다는 분석이다.
이처럼 질러 CEO 체제가 한시적임에 따라 도이치텔레콤의 당면 과제인 부채삭감에는 별다른 진전이 없을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현재 도이치텔레콤은 지난해 350억달러를 들여 매입한 미국 제6위의 이동통신업체 보이스스트림을 매각하고, 독일 내 케이블망도 해외에 매각하는 등 자회사인 T모바일을 상장시켜 부채 규모를 줄이겠다고 발표한 상태다.
그러나 이 방안들은 모두 도이치텔레콤의 자산구조를 송두리째 뒤바꾸는 거대 프로젝트여서 임기 6개월의 임시 CEO가 추진하기에는 버거운 과제들이다.
이에 따라 독일통신업계에서는 오는 8월 21일 발표될 것으로 보이는 질러 CEO의 새 경영계획안보다는 현재 그가 누구를 만나고 있는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질러 이후 도이치텔레콤의 최종 CEO가 누가 될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지난주 질러 CEO가 투자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클라우스 에서 전 만네스만 CEO를 접촉했다는 루머가 돌자 도이치텔레콤 주가가 8%나 급등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한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이런 모든 상황이 오는 9월 독일총선 결과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현 집권당인 사회민주당(SDP)과는 달리 기독교민주당(CDU) 등 야당연합은 대폭적인 정부지분 축소를 포함한 대대적인 도이치텔레콤 경영개혁을 이미 공언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