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순 넥스젠테크놀러지 사장
싱가포르 거리를 걷다 보면 건물 공사장에 공사 개요가 유별나게 크고 선명하게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설계사와 설계자의 이름이 항상 공사 개요 상단에 자리잡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했으나 설계실명제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싱가포르에서는 빌딩마다 설계자의 이름을 명기해 무한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 관례다. 개인의 명예를 생각해야 하는 설계자로서는 아무리 사소한 부실공사라도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대충대충’ ‘빨리빨리’가 중시되는 문화 때문인지 실제 작업에 앞서 탄탄한 기초를 쌓는 작업에 너무나 소홀하다. 정보시스템 분야만 해도 분석이나 설계 단계를 훌쩍 뛰어넘어 곧바로 프로그램 코딩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초가삼간이라면 몰라도 고층건물을 세우면서 완벽한 청사진 없이 건축공사를 시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설계(모델링)의 중요성은 여러 각도에서 강조되고 있다. 설계를 통해 시스템 전체의 균형을 맟춤으로써 유연성과 확장성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유지보수를 포함한 개발 라이프 사이클 전체를 감안하더라도 철저한 분석과 설계 과정을 거치는 것이 투자대비수익(ROI)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다.
국내 업체들이 설계를 등한시하는 데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한다. 우선 설계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다. 고객이 설계(모델링)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프로젝트 개발기간과 예산에 쪼들리다보니 일일이 구색을 가출 수 없어 그냥 건너뛰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느 정도의 프로그램 개발경력만 있으면 설계쯤은 대충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국내 업계의 발상 자체도 문제다. 목수가 집을 몇채 지었다고 바로 건축설계사로 인정받을 수 없듯이 프로그램 개발경력은 설계사의 필요조건은 될지언정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이런 저런 이유로 프로그램 설계에 대한 수요는 창출되지 않고 이것이 다시 전문 설계인력의 양성을 가록막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 시대의 기업정보시스템은 ‘통합’이라는 대명제 아래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이제는 기업내 서로 다른 업무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되고 기업과 기업 사이에는 협업이 가능해야 한다. 이는 시스템의 유연성과 확장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의미다. ITA(Information Technology Architecture)나 TRM(Technical Reference Model)과 같은 표준 소프트웨어 인프라 구축과 함께 그 노하우가 설계작업에 직접 반영돼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모델링 언어도 하나로 통일되고 있다. 국제표준기관인 OMG(Object Management Group)가 제창한 UML(Unified Modeling Language)이 설계언어 분야를 평정하면서 시스템 모델링 분야의 세계 공통어가 탄생했다. 훌륭한 설계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더욱이 설계나 모델링은 유저와 시스템 설계자간의 대화를 유도해 고객친화적인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도록 해준다. 글로벌 경제시대의 정보화는 기업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며 기업경쟁력에 관한한 전문가는 바로 그 시스템을 사용할 유저 자신들이다. 따라서 유저 스스로가 시스템을 구축하는 주전선수로 뛰어야 한다. 시스템 공급업체는 다만 12번째 선수로서 그들을 도와주는 위치에 서 있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월드컵 4강 신화를 만들어낸 태극전사들과 히딩크 감독의 노고에 경의를 표한다. 우리는 그들이 창조한 신화로부터 귀한 교훈을 얻었다. 기본(fundamental)에 충실함이 모든 문제의 정답이라는 것이다. 과연, 정보시스템 구축에 있어 기본은 무엇일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다. IT업계가 과거 일부 몰지각한 건설업체가 남긴 부실공사의 오명을 반복하지 않도록 엔지니어들 스스로가 마음속으로라도 설계실명제를 지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