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인고하고 각성할 때

◆이현덕 논설실장

 

 내일이 처서다. 처서를 고비로 극성스럽던 무더위도 고개를 숙인다. 한낮에는 여름 햇볕이 따갑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감돈다. 옛날 중국에서는 처서 다음 절기인 백로에 이르는 보름 동안 매가 새를 잡아 늘어놓고, 천지가 쓸쓸해지기 시작하며, 논의 벼가 익는다고 했다. 이때부터는 풀도 자라지 않는다. 농촌에서 논밭 두렁의 풀베기를 시작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처서에 비가 내리지 않아야 풍년이 든다고 한다. 결실기에 내리는 비는 농작물에는 극약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처서에 비가 오면 십 리에 곡식 천 섬이 준다’거나 ‘처서에 비가 오면 독 안의 곡식이 준다’는 속담이 있다.

 처서가 들어있는 음력 7월은 다소 한가하다. 농촌에서는 ‘어정 7월이요, 동동 8월’이라고 한다. 7월은 여유가 있어 어정거릴 수 있지만 8월은 일손이 모자라 발을 동동 구른다는 뜻이다.

 절기는 수확기를 향해 가고 있지만 지금 남쪽 수해지역은 시름에 잠겨 있다. 열흘 이상 내린 집중호우로 낙동강 제방이 터져 경남지역의 농경지와 가옥이 물에 잠겼다. 한해 농사가 헛일이 된 것이다. 정부는 수해지역 일대를 ‘자연재해대책법에 의한 피해극심지역’으로 지정하고 수해복구에 전력하고 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아무리 수해복구를 잘해본들 수해 전만 할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늘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다시 비가 내린다니 걱정이다.

 자연재해를 인간의 능력으로 근절할 수는 없다. 아무리 과학이 인류 활동의 모든 분야로 확산돼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자연재해를 최소화할 수는 있다. 바로 유비무환의 자세다. 그것은 생존의 한 방편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기상예보시스템을 구축하고, 사고 요인을 미리 파악해 대비하는 일이다.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는 법이다. 재난구조시스템도 제대로 구축해야 한다. 지금은 구조시스템이 소방당국·경찰·일선행정기관 등으로 분산돼 있다. 부실시공도 뿌리뽑아야 한다.

 수해가 발생하면 그 피해가 막대하다. ‘삼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달 장마에는 못산다’고 했다. 홍수가 나면 모든 걸 다 휩쓸어간다. 남는 게 없다. 지금 수해현장이 그렇다.

 하반기에도 우리 앞에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다. 경기 전망은 불투명하다. 기대를 걸었던 미국과 일본의 경기침체가 여전하다. 국내 기업들의 상반기 실적도 개선됐다고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나아진 게 별로 없다. 국내 기업의 매출증가율은 0.69%로 제자리걸음이다. 매출이 좋아진 것은 금융비용 절감, 환차익, 신규투자 축소, 구조조정 등이 주요인이다. 세계 1등 상품도 감소하고 있다. 96년 91개이던 것이 2000년에는 선진국 구현을 목청 높여 외쳤건만 오히려 81개로 줄었다. 중국은 96년 487개였는데 2000년에는 731개로 늘었다. 1등 상품 부재는 국가경쟁력 부재와 같다.

 미래가 어둡다면 일치단결햬 난국 타개에 나서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입만 열면 국리민복을 외치는 정치권은 정쟁에만 몰두한다. IT 관련 법안 처리나 민생문제 등은 뒷전이다. 기업들은 설비투자를 꺼린다. 사회계층간 갈등도 적지 않다.

 흔히 위기는 기회라고 한다. 이번 수해도 미흡한 점을 거울삼아 완벽한 수방대책을 세운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 급변하는 생존환경에 인간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미래는 달라진다.

 익어가는 가을 길목에서 각자 인고하고 각성할 때 우리는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