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요즘 벤처 CEO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쌀밥 먹던 것 아껴 라면 먹고 버텼는데 이제 그마저도 안될 것 같다는 얘기다.
그들의 말은 결코 엄살이 아니다. 올 상반기만 해도 매출이 전무한 업체들이 부지기수다. 그나마 세금계산서를 끊은 업체들도 자기개발 제품이 아닌 일명 ‘거쳐가기식(큐션)’ 매출이 대부분이다. 코스닥 등록업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수요를 일으킬 만한 시장이 없는 데다 간혹 수요가 생겨도 과당경쟁으로 우량업체까지 부실화하는 악순환이 거듭되는 상황이다.
벤처들이 정작 걱정하는 것은 전환사채부권(CBO)이 한꺼번에 몰리는 연말이다.그들은 이 시기를 생사의 D데이로 잡고 있다. 지난 2년간 5회에 걸쳐 발행한 1조800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CB)가 주식으로 전환돼 돌아올 경우 경영권이 바뀌는 것은 다반사고 문닫는 업체가 줄을 이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벤처들에는 아마 가장 추운 겨울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전혀 다른 세계의 얘기도 있다. 이달 초에 발표된 상장기업의 상반기 순이익은 17조원 수준으로 사상 최대 규모다. 주요 IT기업의 성적표는 더 우수하다. 삼성전자(3조8000억원), KT(1조원), SK텔레콤(9000억원) 등 전기·전자·IT업체가 전체 순이익 가운데 거의 40%에 육박하는 선전을 펼쳤다.
동일한 IT시장에서 영업을 하는 대기업과 벤처기업의 이 같은 극명한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무엇보다 시장구조가 그만큼 왜곡돼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주요 대기업의 순이익만 봐도 그렇다. 사상 최대라는 순익은 번 돈을 그대로 움켜쥐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대기업들이 재투자를 하지 않고 돈을 쌓아놓고 있다는 얘기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협력업체 내지 하청업체 역할을 하는 벤처·중소업체들에 돌아갔다.
국내 IT시장에서 삼성전자·KT·SK텔레콤이 돈을 풀지 않으면 대다수 벤처가 죽는다는 말은 더이상 과장이 아니다. 현실이다. 수출시장에서 독자적인 영업력을 가진 몇몇 벤처업체를 제외하고는 이들 대기업의 그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구조다. 시장지배자로서의 입김이 너무 강해 그들을 통하지 않고는 시장이 형성되지 않고 납품 루트 또한 확보하기 힘든 실정이다.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은 여전히 딴전이다. 프로젝트 수주 시 디스카운트금액을 협력업체에 전가하는 식의 쥐어짜기는 여전하고 심지어 그룹오너의 지분으로 만든 ‘로열벤처’를 마구 양산, 자신들의 수익창구로 활용 중이다. 말로는 대기업-벤처 윈윈전략을 떠들면서 한켠에서는 그룹오너의 지분으로 만든 위장벤처로 창구를 일원화해 시장질서를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기술력을 가진 진정한 벤처들이 이들 대기업에 납품하려고 고생할 때 ‘그룹사 입구’에 회사를 차려놓은 로열벤처들은 힘들이지 않고 입장료 수입만 챙겨도 배부른 구조다. 실제로 무늬만 벤처인 로열벤처에 의한 상대적 박탈감이 절대적 빈곤보다 벤처 사장들의 힘을 더 빠지게 한다는 후문이다.
이대로 간다면 연말쯤엔 벤처들의 집단장례식을 구경해야 될 것 같다. 물론 마땅히 죽어야 할 업체가 죽는 옥석가리기의 한 과정이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협력업체(파트너)의 희생 위에 혼자만 살겠다는 움켜쥐기와 이젠 벤처까지 양산하는 재벌의 문어발식 구태에 의한 인위적인 고사라면 분명 큰 문제다. <김경묵 경영기획실 부국장 km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