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VCR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DVD 규격 경쟁이 막을 올리고 있는 가운데 ‘VCR 전쟁’의 패배자인 소니의 베타방식 VCR가 무대의 뒤켠으로 사라진다.
청색 레이저를 사용, 현행 DVD의 5배가 넘는 용량을 갖출 차세대 DVD 규격 경쟁은 소니, 마쓰시타 등을 중심으로 한 한·일·유럽 등 3개국 9개사 동맹군과 도시바·NEC 연합군과의 한판 승부로 좁혀지고 있다. 상호 호환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세계 규격으로 자리를 잡으면 자연스레 한편은 소멸되는 ‘제로 섬’ 싸움이 개시된 것이다.
소니는 DVD 규격 경쟁을 눈앞에 두고 지난 세대 패배의 상징인 ‘베타방식 VCR’의 생산을 중단하는 셈이다.
베타방식 VCR는 소니가 지난 75년 처음 발매했다. 이듬해 일본빅터(JVC)가 VHS방식 VCR를 내놓으며 가전 왕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 VCR 전쟁이 막을 올렸다. 베타방식은 84년 한때 230만대를 출하하기도 했으나 같은해 베타진영의 다른 한 축이었던 도시바가 VHS방식 판매를 개시하며 경쟁에서 밀려났다. 88년에 소니 자신이 VHS방식을 채택하며 베타방식은 사실상 격전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베타방식 VCR는 지난해 약 2800대 출하를 하며 명맥을 유지, 결국 올해를 끝으로 생산이 중단된다. 이미 일반 소비자의 기억에서 사라진 베타방식이 2002년까지 계속 생산됐다는 점이 오히려 놀라울 뿐이다.
또 다른 전쟁인 DVD 규격 경쟁은 소니가 내년 신규격 제품을 내놓으면서 시작될 예정이다. 이에 맞서 도시바는 오는 2004년 제품화에 나선다. 양 진영은 대세를 잡은 쪽만이 살아남는다는 절박함 속에서 규격 경쟁에 임할 것이다.
일부 관계자들은 VCR시대와는 달리 인터넷의 초고속화가 진행되고 있어 개인의 기록수단이 한 개가 아닌 여러개가 존재할 수 있다며 복수 규격이 존재할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시장내 두개 규격 공존공생에 대한 회의론이 더 힘을 얻고 있다.
문제는 규격 경쟁의 피해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갈 공산이 크다는데 있다. 소니의 베타방식 VCR는 전세계 누계 1800만대가 팔려나갔다. 그들 모두가 피해자일 수 있는 것이다.
베타방식의 마지막 모델인 ‘EDV-9000’ ‘SL-200D’의 생산 중단이 치열한 시장 쟁탈전의 본보기로서뿐만 아니라 소비자를 생각하는 DVD 규격 경쟁 룰을 정하는 한 계기가 돼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도쿄 = 성호철 특파원 hcs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