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어윈 제이콥스 퀄컴 회장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퀄컴의 사업이 우리나라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인지 제이콥스 회장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관련업계의 시선이 집중된다. 이번 방한은 특히 퀄컴의 무선인터넷 플랫폼 ‘브루’와 우리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표준인 ‘위피’와 논란이 있는 상황이어서 제이콥스 회장의 행보에 쏠리는 관심은 지대했다.
제이콥스 회장은 1박2일의 짧은 일정임에도 불구하고 이상철 정보통신부 장관과 이동전화사업자 CEO들과의 만남은 물론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 등이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제이콥스 회장은 당초 계획했던 일정을 마치기도 전에 충분한 설명도 없이 돌연 출국해 버렸다.
퀄컴 관계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태풍이 상륙하면 제이콥스 회장의 전용기 이륙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불가피했다는 설명이다. 이 바람에 제이콥스 회장과의 미팅을 고대했던 국내 이동통신업계 CEO들은 바람맞은 ‘꼴’이 됐다. 인터뷰 준비를 해온 기자들 또한 허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약속에도 우선 순위가 있을 수 있다. 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약속이라면 과감하게 취소할 수도 있다. 더구나 새로운 비즈니스를 위해서는 ‘작은’ 약속쯤이야 ‘큰’ 약속을 위해 내버릴 수도 있다. 퀄컴은 중국과의 ‘큰’ 약속을 위해 우리나라와의 ‘작은’ 약속을 미련없이 버린 셈이다. 중국과의 비즈니스가 더 크고 중요하기 때문에 한국은 응당 다음 순위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이같은 상황은 통신용 칩과 관련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은 이미 퀄컴에 묶여 있고(lock-in) 대안도 없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퀄컴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위피’라는 무선인터넷 플랫폼이 없었다면 그나마 장관과의 일정도 지켜졌을지 의문이다. ‘위피’라는 표준이 제 궤도로 오르게 되면 자사 플랫폼인 ‘브루’의 확산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전략적인 차원에서나마 방문이 이뤄졌다는 평가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현실’은 중요하다. 따라서 중요하지 않은 ‘약속’은 뒤로 밀릴 수도 있다. 퀄컴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상도의 기본은 신뢰다. ‘작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퀄컴이야말로 얼마든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제2·3의 약속 위반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퀄컴의 이같은 행위를 통해 칩·플랫폼 등의 복수표준이나 둘 이상의 기업을 파트너로 끌고 가는 정책이 필요함을 배우는 셈이다.
<김규태기자 star@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