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단상]DNA와 운명론

 ◆박선희 ETRI 바이오정보연구팀장 shp@etri.re.kr

과학기술 분야 종사자들에게는 의외로 운명론자가 많다.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고 상상력을 가동시키는 사람들과 운명론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그들의 운명론적 시각도 일리는 있다.

 몇년 전 학회에서 만났던 세계적인 해부학자인 독일의 슐츠 교수는 ‘쥐의 뇌 구조는 태어나면서부터 형성되고 기네아 피그는 이미 태어날 때 대부분이 형성되어 나온다. 사람의 경우 기네아 피그와 비슷해서 태어날 때 이미 70% 이상이 형성되어 나온다. 교육학자들이 나에게 항의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리 교육을 해서 IQ를 높이려 해도 별 소용이 없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물리학적으로 이해를 해도 물체가 움직일 때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혹은 어떤 시스템이 변화를 할 때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과 같은 이미 정해져 있는 규칙을 따른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체로서의 모든 정보가 DNA에 입력되어 태어난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보들은 외부 환경에 따라 매우 다르게 표현될 수 있다.

 지난 2000년 ‘네이처’지에 소개된 한 논문에서는 세개의 유전자와 이 세 유전자들의 활동을 조정하는 프로모터로 구성된 간단한 유전자 네트워크를 디자인해서 구현한 결과가 실렸다. 이 네트워크를 대장균 세포 내로 삽입하면 세포내의 온도와 같은 환경에 따라 다른 활동 양상을 보여서 결국에는 세포의 성장 주기와 같은 전체적인 세포의 라이프 사이클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생체 기능이 달라질 수 있는 주위 환경이라든지 기능을 변화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의 유전자도 환경에 따라 활동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 스트레스가 암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더욱이 우리의 기술이 발달하여 유전자 기능까지도 제어할 수 있다면 운명은 반드시 정해져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런 환경에 접하는 것도 이미 인과 관계에 의해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라는 전제 조건이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