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월드]미국-잉크 카트리지 `하이테크 전쟁`

 휴렛패커드(HP)는 프린터와 컴퓨터로 유명한 회사지만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매출의 15%와 순익의 절반 정도가 단순 소모품인 잉크와 토너 카트리지에서 나온다.

 이에 따라 HP는 달러박스인 잉크와 토너 카트리지 시장을 복제품 제조업체로부터 지키는 일이 중요한 현안이다. 실제 HP가 지난해 3월 신형 레이저 프린터 ‘HP4100’을 시판하면서 129달러인 토너 카트리지에 작은 ‘스마트 칩’을 단 것도 대응책의 하나다.

 이 칩은 이용자에게 토너의 남은 양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여준다. HP는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이 칩은 카트리지 복제를 어렵게 만들려고 고안된 게 분명하다.

 캘리포니아주 카슨의 소규모 프린터 부품 제조업체인 라이노텍컴퓨터프로덕츠가 6개월 전 HP가 카트리지를 공식 발매하기 전에 시제품을 비밀리에 입수했다. 라이노텍은 비밀리에 유출된 이 시제품 덕분에 지난달 HP처럼 스마트 칩을 단 ‘HP 4100용 카트리지’를 선보일 수 있었다. 라이노텍은 토너 카트리지를 HP 정품보다 22% 싼 100달러선에서 판매중이다.

 라이노텍 등 이른바 프린터 카트리지 ‘재생업체’들은 80년대 가내 수공업 형태에서 발전해 이제는 수십억달러 규모에 달하는 하이테크 시장의 한 부문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업체는 중고나 새 부품을 조립해 HP, 렉스마크인터내셔널, 세이코엡슨, 캐논 등이 독차지하던 카트리지 시장을 갉아먹고 있다. 대부분 프린터 업체들이 경기침체로 잉크와 토너 부품 판매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복제품은 ‘눈엣 가시’일 수밖에 없다.

 재생업체들은 자기만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신제품에 대한 최신 정보를 신속하게 얻는다. 라이노텍의 최고경영자(CEO)인 데이비드 나이더퍼는 “HP 제품 취급 소매업체와 HP 하청업체 직원들로부터 정보를 얻고 있다”고 밝혔다. 재생업체들은 때로는 기술적 장벽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경우도 있다.

 프린터 카트리지 사업은 면도날을 팔기 위해 면도기를 제공하는 고전적인 사업모델을 따른다. HP는 프린터를 최저 50달러까지 싸게 파는 대신 카트리지는 소매가로 17달러 99센트에서 최고 300달러에 팔아 이익을 챙긴다. HP의 프린터 및 이미징 사업 책임자인 보베시 조시는 “프린터 하나를 사면 3∼4년 동안 카트리지도 사게 된다”며 “이로 인해 프린터 가격이 지난 5년 동안 크게 떨어졌지만 카트리지 가격은 오히려 올랐다”고 밝혔다.

 프린터 시장을 18년간 지배해 온 HP는 재생 모조품을 막기 위해 저작권법도 동원하고 있다. HP는 과거 카트리지 신모델 한가지에 몇 건의 특허만 출원했으나 지금은 미국과 20여개국에서 동시에 특허를 출원하고 있다.

 재생업체들은 특허 침해 사실을 강력 부인한다. 나이더퍼는 “우리는 그들의 기술을 복제하지 않는다”며 “다 쓴 카트리지에 우리 기술과 다른 부품을 결합시켜 새 제품을 만든다”고 강변했다.

 일부 재생업체는 HP와 렉스마크 등 프린터 업체들이 할인 경쟁을 막아 반독점법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맞제소를 하기도 했다. HP는 재생업체들의 시장독점 주장에 대해 “지금까지 독점금지법을 위반했다는 판결은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며 “미국과 외국의 독점금지법과 경쟁법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고 반박했다.

 기업분석회사 리라리서치에 따르면 재생업체들의 카트리지 시장 점유율은 21% 정도에 달한다. 재생업체의 카트리지 판매 신장률은 중견 프린터 메이커의 신장률 6.5%를 훨씬 웃도는 12%에 육박하고 있다.

 옴니컴퓨터프로덕츠 계열사인 라이노텍은 직원이 240명으로 한달에 한번꼴로 HP 프린터용 카트리지 신제품을 내놓고 3∼4개월에 한번 정도 신형 카트리지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 업체의 지난 해 매출액은 3300만달러에 달했었다.

 라이노텍은 HP의 스마트 칩을 단 신형 카트리지 시제품을 입수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사만 시제품을 확보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라이노텍의 중역들은 2000년 9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재생업체 회의에서 다른 두 업체도 시제품을 입수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재생업체들은 이에 따라 추후 재생 카트리지에 달 스마트 칩을 공동으로 설계키로 합의했다. 재생업체들을 대표하는 변호사인 로널드 카츠는 “이 같은 협력은 이들 회사의 규모가 작고 시장 점유율이 미미해 독점금지법상으로 아무런 문제가 안된다”고 밝혔다.

 HP도 재생업체에 별다른 반독점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라이노텍 직원들은 4100 시제품을 30가지 부품으로 분해해 조사했다. 라이노텍은 지난해 9월 30가지 부품의 조달처를 밝혀냈고 올 2월에는 스마트 칩 시험에 착수했으며 마침내 자사 제품을 지난 8월 30일 선보일 수 있었다. 다른 재생업체도 각기 독자적인 제품을 내놓았다.

 나이더퍼는 “우리의 활력은 대형 프린터 메이커들보다 앞서면 앞섰지, 뒤지지 않는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HP가 앞으로도 계속 이들을 그냥 두고만 볼지는 미지수다.

 HP측은 “라이노텍의 4100용 카트리지 제품에 어떤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나 상황을 계속 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공식기자 kspark@ibiztod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