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한국의 대표주자인 셋톱박스 수출시장에 적신호가 켜졌다고 한다. 국내 업체끼리 치고받는 제살 깎아먹기식 과당경쟁과 덤핑수출로 인해 셋톱박스 수출가격이 불과 2년여 만에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가파르게 상승하던 수출성장률도 둔화되는 추세라니 걱정이다.
잘 알다시피 셋톱박스는 IT산업을 대표하는 일등상품으로 대다수 중저가 기술 상품시장을 중국에 빼앗긴 우리가 꼭 지켜야 되는 절대품목의 하나다. 반도체 수출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셋톱박스와 같은 일등상품의 발굴·육성이 급속하게 쇠퇴하고 있는 경제성장의 잠재력을 재충전시킬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한마디로 21세기 개방경제체제 아래서 크게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수출기반을 안정시킬 기대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덤핑공세 및 과당경쟁으로 인해 셋톱박스시장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제품에 대한 이미지가 훼손될 뿐만 아니라 일등상품·일등서비스·일등콘텐츠로 승부하기 위해 기술개발자금을 지원하는 등 일등상품 발굴에 나선 정부의 수출확대 전략에도 차질을 빚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투구식 경쟁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시장에 진출했다는 소식만 들리면 벌떼처럼 몰려들면서 가격인하 공세를 펴기 때문이다. 가격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오죽하면 해외에 진출하기 위한 통과의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것이 덤핑경쟁이다.
실제로 셋톱박스 수출가격은 연초보다 30%, 지난해 초보다는 최대 60% 정도 떨어졌다. 저급모델(로엔드)인 무료방송수신(FTA)형 제품의 경우 지난해 1월 평균 150∼160달러를 유지하던 수출가격이 올 2월에는 65∼70달러로 떨어졌으며 이달 현재 60달러선을 겨우 유지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더 큰 문제는 지난해부터 국내 업체가 주력하고 있는 고급형(하이엔드) 모델의 수출가격이 떨어지는 것이다. 중국이나 대만 업체의 저가공세와 함께 국내 업체간 과당경쟁이 자초한 결과다. 이로 인해 IT산업의 대표적인 효자 수출품목인 디지털 셋톱박스 수출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다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수출규모는 크나 수익성이 낮았던 아날로그 셋톱박스 시절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될 정도다.
물론 가격경쟁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생산성 제고 등을 통해 원가를 낮출 수도 있고,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전략적으로 가격인하 공세를 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원가 이하로 공급하는 덤핑수출이다.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덤핑공세는 한국제품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제조업체의 채산성 악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대에 못미치는 낮은 매출과 악화된 채산성으로 인해 경영난을 겪는 업체도 적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타 산업과 비교하면 아직은 수출성장률은 높다는 것이다. 목표(35%)에는 못미치나 지난 8월까지 3억6400만달러를 기록하면서 작년 동기 대비 29% 증가했다.
디지털시대로 접어들수록 기술력 차이는 확연해진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국내 업체들도 가격인하 경쟁을 자제하고 중장기적인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등 기술과 품질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