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월드]미국-실리콘 밸리 실직자의 `애환`

 실리콘밸리의 해고자들은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재취업이 어려워지면서 ‘가족이 최후의 안전지대’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고 있다.

 해고자들은 퇴직금과 실업수당으로 일자리를 찾으며 그럭저럭 버티고 있다. 이들은 하지만 실업상태가 장기화되면서 부모나 친인척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해고자들이 스스로 가족과 인척의 도움을 얻기 위해 손을 벌리는 경우도 있고 아시아계 이주자처럼 상부상조 전통이 강해 해고자를 자발적으로 껴안고 경제적 도움을 주는 사례도 있다. 나이가 많은 근로자들은 오랫동안 실리콘밸리에서 쌓은 자신의 경력이 아무런 소용없게 된 현실을 깨닫고 자식들에게 기대곤 한다.

 탄 트랜(55)은 시스코시스템스의 전기기술자로 일하다가 1년여 전 해고된 뒤 기술 컨설턴트로 일하는 그의 아들 루아트의 도움을 받고 있다. 아들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월세마저 내지 못했을 뻔했다. 루아트는 사실 자신의 직장마저 불안한 형편이었지만 아버지의 처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전문가들은 경제침체기에는 가족과 친인척에 의지하는 실직자가 급증하게 마련이라고 해석한다. 인디애나대학의 교수 로버트 빌링햄은 자신이 연구를 시작한 뒤 “경기가 침체에 빠져 친인척간의 상부상조가 두드러진 때가 적어도 3차례 이상 있었다”며 “실직자가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곳은 가족”이라고 꼽았다.

 독신녀 앨런 가르샤(45)는 이일 저일 닥치는 대로 하면서 10살바기 아들을 친정 어머니에게 맡겼다. 어머니는 그녀의 월세와 전기, 수도요금도 대신 내주고 있다. 최근 지역의 한 창고에서 일했던 그녀는 “도와줄 사람이 있어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며 “친인척이 없다면 곧바로 거리에 나앉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이주자 대부분은 상부상조 전통이 강하다. 가족간 유대관계가 아주 깊고 3세대 이상의 가족이 동거하는 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UCLA 교수 민 조우는 특히 2세대 이주자들은 부모를 공양해야 한다는 의식이 아주 강하다고 꼽았다. ‘미국인으로 자라기:베트남 어린이의 미국생활 적응방법’ 저자인 조우는 “이민자들은 대가족제가 아닌 관계로 가족보다는 자식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2세대 이주자의 부모부양 의무감이 강하다”고 밝혔다.

 시스코에서 해고당한 전기기술자 친 엔구인(55)은 두 아들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받고 있다. 새너제이에 사는 그는 “지금 아주 힘들다”며 “전기기술자로 30년 넘게 일하다가 갑자기 실직당한 뒤 취업면접을 해도 나이가 많다고 퇴짜를 맞곤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트랜처럼 아들에게 도움을 간청할 필요가 없었다. 트랜과 함께 지난해 4월 해고당한 그는 “자식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베트남 문화에서는 어렵지 않다”며 “아들들은 나이가 많은 부모를 기꺼이 돕는다”고 전했다.

 웹설계자인 폴 라이젠후버(34)는 샌프란시스코의 집주인이 아파트와 닷컴 사무실 임대료를 올리는 바람에 2년 전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그는 현재는 미주리에 있는 가족농장에 기거하며 일자리를 알아보면서 이일 저일 잡다한 일을 도맡아하고 있다. 그는 가끔 삼촌이 무료로 빌려준 사무실에서 웹 개발작업을 하곤 한다.

 지금은 사라진 ‘X라디오’라는 온라인 음악회사를 지난 95년 설립했던 그는 “처음 돌아왔을 때 부모들이 아주 좋아했다”며 “하지만 할 일이 아직 없어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박공식기자 kspark@ibiztod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