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경 마리텔레콤 대표이사 gracia@maritel.com
5년 전 IMF기간에 국민의 정부가 탄생했을 때 대한민국의 내수시장은 절망적이고 참혹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우리의 살 길은 세계시장 진출’ 이라는 깃발을 내세우고 월스트리트에서 실리콘밸리까지, 도쿄에서 런던까지 ‘대한민국의 상품을 사달라’ ‘대한민국에 투자해달라’며 세계 정부의 지도자들과 세계적인 기업경영자들을 만나 연설하고 또 설득하는 여정을 수행팀의 일원으로 지켜본 적이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세일즈맨으로 자처한 노(老)대통령의 깃발과 열정, 노고에 감동해 허리를 일으킨 사람들은 대한민국의 젊은 벤처기업 사장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마리는 가장 작고 강한 존재였다. 마리가 개발한 제품이 미국 시장에서 그 가혹한 프리프러덕션(preproduction), 프러덕션(production), 포스트 프러덕션(post production) 과정을 치러내고 2년 만에 첫번째 미국 수표 48달러를 받아들였을 때는 환희 그 자체였다. 첫 매출 48달러가 160만달러가 되고 그것이 다시 240만달러가 되는 데 꼬박 2년이 걸렸다.이 매출의 수치가 국내 온라인게임 수출의 65%를 차지할 정도로 국내시장의 해외시장 진출 실적은 미미했고 세계시장의 벽은 높기만 했다.
세상의 이치가 돌고 돈다는 말처럼 2000년 세계시장의 중심이던 미국의 실리콘밸리가 나스닥 붕괴와 더불어 ‘부도(Bankrupt)’와 ‘해고(Layoff)’의 키워드로 대체됐다. 반면 같은 기간에 어둡게만 보이던 국내 게임시장은 초고속인터넷 인프라가 보급되면서 세계의 황금어장으로 빠르게 성장했다.
미국시장으로 기반을 옮긴 마리는 매달 20만달러 이상씩 광고매출을 올려주던 대형 닷컴들이 연쇄부도를 맞으면서 졸지에 가장 촉망받던 회사에서 매출 없는 천덕꾸러기 회사로 전락했다. 생존을 위한 피눈물 나는 자구의 노력을 하면서 시장이 다시 열리기만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마리가 해외 진출 성공사례1호 벤처기업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 마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한 사실은 돈이 없다는 절박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시장을 향한 대한민국 벤처기업들의 야망이 대한민국이라는 조그마한 시장에 갇혀 버린 사실이었다. 국내시장에서 먹고 살게 된 업체들은 이제 세계시장에 나간다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됐을 뿐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힘든 모험이며, 그 땅에서 자리잡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조차 새하얗게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해외시장에 진출한 업체도 간혹 보였지만 자기보다 잘난 상위업체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열등한 업체들과 경쟁하는 데 그치고 마는 꼴을 보고 답답했다.
5년의 세월이 지나고 지금 다시 새로운 대통령과 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이 땅의 벤처기업들은 그동안 그들이 조그마한 국내시장에서 겪은 과열경쟁과 과잉투자의 후유증에 진저리치면서 ‘우리의 살 길은 해외 진출’ ‘우리의 살 길은 글로벌화’라고 또 한번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 겨우 먹고 살게 된 그들에게 해외시장에서 단독으로 승부수를 던질 체력은 없다. 누군가 그들에게 해외시장으로의 탈출구를 시스템적으로 열어주지 않으면 3년 전 나스닥 폭락 때 마리가 그랬던 것처럼 결국 그 시장과 함께 동반자살 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새 디지털 정부의 새 디지털 대통령과 각료들은 지난 5년간의 정부와 기업의 시행착오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세계시장에 대한 전략과 전술을 확정하고, 이 목표를 이루기에 합당한 군자금을 확보하고, 기업들을 교육해서 무장시킨 후 세계시장이라는 전쟁터로 진군시키기를 권유하고 싶다. 국내시장에서만 통하는 게임의 규칙으로 세계시장에 진입해봐야 국제적인 사기꾼들의 손아귀에서 봉 노릇이 고작이다.
이스라엘의 벤처기업들은 2∼3년 내 거의 미국 나스닥의 반열에 오른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마리의 시행착오를 대한민국의 어린 벤처기업들과 공유함으로써 그들이 성공적으로 세계시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기 때문이다.
정부가 함께 세계시장으로의 길을 열어가지 않으면 이스라엘처럼 나스닥의 문에 들어설 수 있는 국내 벤처기업이 나오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새로운 국민의 정부, 새 대통령과 새 내각이 어떤 깃발을 들고 대한민국의 벤처기업과 국민에게 희망의 씨앗을 파종할지 필자는 아직 모른다. 다만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21세기의 주인공으로 세계의 중심에서 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실천과 예측이 가능한 길을 제시해주었으면 할 뿐이다.
미국은 아직 전국민의 70%가 모뎀사용자다. 이에 비하면 대한민국의 유무선 초고속망은 세계적인 비교우위와 경쟁력을 지닌 인프라다. 이를 선체험하고 압축체험한 대한민국의 젊은 벤처인들이 세계의 중심에 다시 한번 도전해승리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통로를 열어줘야 한다.
마리는 지난 3년간 지루하고 고통스런 인내와 칩거의 세월을 접고, 또 다시 세계의 중심으로 출발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