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전세계 하이테크업계는 최악의 불황을 겪었다는 점 이외에는 별다른 특징을 찾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 동화에 나오는 주인공 립 밴 윙클(Rip Van Winkle)이 1년 내내 잠만 자고 일어나도 아무 변화를 못 느꼈을 것이라는 농담을 할 정도다. 전문가들은 올해에도 이러한 상황에 큰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특히 컴퓨터와 통신 등 정보기술(IT) 관련 분야에서는 기업과 소비자들이 지난 90년대에 구입한 최신 디지털 제품을 아직껏 ‘소화하고 있는’ 긴 전환기에 있다. 기업과 소비자들은 앞으로 유용한 기술과 불필요한 기술을 가려내기 위해 힘을 쏟고 있는 분위기다.
게다가 슬프게도 경기침체의 끝은 아직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하이테크 세계는 죽은 ‘닷컴 망령’이 주변을 배회하는 것 같고 겉보기에는 활력이 넘쳐나지만 속으로 ‘썩고 있는 기업들’이 널려 있다. 이제 미국의 각 지역 대형 시내전화 회사들과 AOL타임워너 같은 미디어 거인들마저 존립기반이 위태로울 지경이다. 앞으로 더 많은 초대형 파산이 있고 나서야 ‘인터넷 대붕괴’가 끝날 지 모른다.
최근의 호황과 불황을 번갈아 겪으면서 하이테크산업에는 한 가지 공통된 기조가 저변에 깔려 있다. 바로 인터넷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활동이 벌어지는 온라인화가 대세라는 사실이다. 미국인의 3분의 2가 인터넷을 이용하고 날마다 그 수가 늘어가면서 우리의 생활방식마저 바꿔가고 있다. 기업들은 온라인화 추세에 맞춰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너도나도 새로운 디지털 기술로 수익을 올리는 길을 찾고 있다.
지난해 등장한 새 기술 트렌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인터넷의 데이터 트래픽은 급증하는 반면 구형 전화시스템의 음성 트래픽은 줄어들고 있다. 국제통화 10통화 중 1통화는 인터넷을 이용한 것이다. 온라인 쇼핑은 오프라인 소매보다 10배 이상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온라인 쇼핑 확대추세는 생산·유통·소매 형태를 바꿔놓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지난해 음악CD 판매가 10% 가량 줄어들었다. 음반업계는 CD 판매감소가 인터넷 무료 음악교환 사이트 보급에 일부 원인이 있다고 판단한다.
비디오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PS)2 생산업체 소니, 게임큐브의 닌텐도, X박스의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비디오 게임기 메이커 모두 지난해 온라인 멀티게임 버전을 선보였다. 온라인 게임은 21세기에 비디오 게임의 사회적 비중을 한층 높일 전망이다.
수백만 미국인들이 데이트 장소로 술집 대신 인터넷을 선택해 온라인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인터넷 교육도 경제적 침체와 상관없이 확대일로에 있다. 지금까지 50만명의 학생들이 미국 사이버 교육 선두주자인 피닉스대학온라인에서 강의를 들었다.
부시 미 대통령은 지난해 말 전자정부 법안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미 정부는 앞으로 4년 동안 3억4500만달러를 투입해 온라인에서 제공하는 연방 서비스를 대폭 늘릴 계획이다.
지난해 두드러졌던 이런 기술 트렌드는 미디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월드컴·글로벌크로싱 등 통신업체들의 초대형 파산신청과 회계부정 사건에 견주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지난해에는 기업 스캔들·도산·해고·구조조정에 관련된 굵직굵직한 뉴스들이 특히 많이 터져나왔다.
지난해 이러한 사건들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던 하이테크산업에서 벌어진 의미 있는 발전은 어떤 것을 꼽을 수 있을까.
첫째, 지난해 가장 중요한 컴퓨터 트렌드는 ‘와이파이(Wi-Fi)’라는 무선인터넷 접속 기술표준의 광범위한 보급을 들 수 있다.
와이파이 장비는 방송전파로 데이터를 전송하는 데에 허가받지 않은, 달리 말해 무료인 라디오 스펙트럼을 활용한다. 와이파이는 올해 선보일 신형 랩톱컴퓨터와 핸드헬드 장치 거의 대부분에 들어가는 추세다.
더구나 공공장소에서 와이파이 장비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는 ‘핫스폿’이 미 전역의 공항·호텔·공공빌딩 등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막대한 부채를 끌어들여 초고속 무선 네트워크를 건설한 이동전화사업체에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둘째, 케이블TV회사와 각 지역 시내전화회사간 광대역 인터넷 시장 쟁탈전은 아직까지는 무승부로 남아 있다. 케이블회사들이 가입자를 더 많이 유치했지만 시내전화회사들은 미 연방통신위원회(FCC)와 미 의회로부터 자신들에 유리한 규제완화정책 법률입안을 위해 로비활동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그 결과는 아직 불분명하다.
미 정부는 지난해 말 한 보고서에서 전화선을 이용한 디지털가입자회선(DSL) 인터넷 접속자가 510만명, 케이블 라인을 이용한 초고속 인터넷 접속자가 920만명에 달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이같이 광대역 가입자가 늘어나고 있으나 증가율은 2001년 하반기 33%에서 2002년 상반기 27%로 둔화됐다.
셋째, 인터넷의 차세대 프런티어인 업무 자동화다. 세계 정상급 소프트웨어업체들은 2년 연속 인터넷에서 기업업무를 자동화하는 새로운 프로그래밍 언어개발에 열을 올렸다. MS는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선 원(Sun ONE)’ 소프트웨어 전략과 IBM의 ‘웹스피어’와 유사한 ‘닷넷(.Net)’이라는 윈도 인터넷 버전을 앞세워 승부를 걸고 있다.
이 같은 시스템은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을 별도로 운용하는 기업들의 컴퓨터가 인간의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인터넷에서 자동적으로 협업하도록 설계됐다. 이에 따라 여러 출처에서 한번에 데이터를 취합해 여행자제 자동경보, 개인 투자상담 등 웹 기반 서비스를 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손쉽게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일각에서는 이런 인터넷 서비스가 현실성이 결여돼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넷째, 미디어 분산화 추세가 지속됐다. 영화 사이트 무비링크닷컴(Movielink.com)과 음악 사이트 프레스플레이와 뮤직넷을 후원하는 음악 및 영화산업계는 다른 파일교환 웹사이트를 불법복제 혐의로 제소하고 디지털장치에 저작권 보호장치 설치를 의무화시키는 입법을 위한 로비활동을 벌였다. 그래도 음악 및 영화업계가 직접 지원하는 사이트들의 회원가입은 저조했다. 올해 말까지 상용CD에 훨씬 많은 저작권 보호장치가 설치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고 디지털 해적행위가 근절되리라 기대하기는 힘들다. 소비자들은 읽고, 듣고, 보는 데 자신들이 주도권을 가지려는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음악공유 이외에 개인 웹출판이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아메리카온라인(AOL)이 웹 로깅 툴을 선보이는 올해 ‘웹 로그’나 ‘온라인 다이어리’는 더욱 중요한 문화적 추세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제공=ibiz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