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아이월드네트워킹 대표 hur@iworld.net
우리가 벤처기업의 육성을 이야기하면서 모델로 삼는 것이 실리콘밸리의 벤처 생태계다.
여기에는 벤처캐피털과 법률회계 등 지원기능을 비롯해 벤처기업의 성장을 도와줄 수 있는 유능한 경영자풀, 기본원칙에 철저하면서도 유연한 나스닥 주식시장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또 철저한 기업간의 역할분담을 통해 자기 회사의 핵심기술 이외의 모든 기능을 외부에서 조달할 수 있는 기업간의 네트워크 등 여러가지 주요 요소가 잘 짜여진 생태계처럼 돌아가고 있다.
여기에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주요한 한 가지 요소가 있다. 즉 벤처기업이 실패하는 것을 용납하고 오히려 몇 번의 실패를 더 좋은 경험으로 인정해주는 제도와 분위기다. 실리콘밸리의 투자자가 선호하는 기업가는 두 번 정도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도 있다. 한 번도 실패해보지 않은 사람은 경험이 너무 없어 위험하고 두 번 이상 실패한 사람은 경영능력상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창업자가 절대 실패해서는 안되는 환경이다. 업계의 분위기가 실패한 경험을 용납해주는지 여부를 떠나서 제도적으로 기업의 대표이사는 기업이 실패하면 절대 재기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기업 부채에 대표이사는 의무적으로 개인보증을 서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벤처캐피털에서 투자를 받으면서도 기업이 어려워지면 대표이사가 벤처캐피털의 지분을 재매입하는 형태로 투자금액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경우까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이 실패하게 되면 대표이사(주로 창업자)는 수억에서 수십억에 이르는 금액에 대해 개인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절대 재기할 수 없는 상태가 돼 버린다.
미국의 대다수 벤처기업이 외부 채무 없이 벤처캐피털의 투자자금으로 운영되는 것에 비해 한국 기업은 대부분 은행이나 정부로부터의 부채 없이 운영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벤처를 살리기 위한 정부의 지원자금조차도 대표이사의 개인보증을 요구하는 부채 형태로 같은 결과를 낳는다.
과연 우리나라의 벤처기업 중 미국의 유명한 벤처기업들과 같이 혁신적인 기술이나 제품을 만들어낸 업체가 몇 개나 될까. 실패할 가능성을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기업에서 얼마나 혁신적인 기술과 제품을 시도해볼 수 있을까. 많은 벤처기업들이 혁신적인 새로운 기술이나 비즈니스를 추구하는 모험 기업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평범한 중소기업이 되어 버리는 상황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물론 은행과 정부, 벤처캐피털 각각의 입장에서는 대출이나 투자금액에 대해서 대표이사의 보증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기업에 대해서 책임져야 할 사람의 보증을 통해 대출과 투자자금의 회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없애려면 근본적으로 연기금 등 벤처캐피털에 투자하는 기관투자자와 벤처캐피털, 벤처기업, 코스닥으로 이어지는 직접 금융시장의 사이클을 활성화시켜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가 활성화되고 벤처기업은 이러한 자금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관련된 여러가지 이슈들이 혼재돼 있다. △벤처캐피털 펀드가 5∼7년의 단기성이 아닌 미국의 대부분 펀드처럼 10년의 장기펀드가 되어야 하는 점 △이를 위해 연기금 등 장기성 자금이 벤처캐피털 펀드 조성에 참여하는 점 △코스닥 활성화와 록업(lock-up) 완화 등 ‘투자회수(exit)’를 더 자유롭게 하는 제도를 통해 벤처캐피털이 투자자금을 회수할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주는 것 △코스닥 활성화를 위해 등록은 좀 더 쉽게 하고 동시에 분명한 퇴출제도를 운영하는 것 등 여러가지 복합적인 시스템 운영이 관련돼 있다. 이 때문에 긴 시간을 가지고 하나씩 제도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것이다.
하나 분명한 것은 실패할 자유가 없는 벤처기업은 더이상 모험 기업이 아니고 이러한 환경에서는 벤처를 통한 혁신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벤처기업 창업자에게 실패할 자유를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