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긴 겨울잠을 자던 일본의 대학들이 ‘IT강국 건설’을 위해 저마다 기지개를 켜고 있다.
장기화되고 있는 일본의 불황을 더 이상 팔짱만 끼고 지켜볼 수 없다는 듯이 ‘순수 학문의 울타리’를 과감히 박차고 나오고 있다. 민간기업이나 정부와의 이른바 산관학 교류 프로젝트가 현재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변화의 연속선상에서 파악되고 있다.
과연 전통적으로 보수성이 강한 일본의 대학들이 IT 발전의 허브(중심축) 역할을 하며 일본 경제회복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할 수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학발 VB 봇물=2002년 한해를 장식한 빅 뉴스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대학발 벤처비즈니스(VB) 기업의 주식시장 상장 소식이다.
유전자 치료약을 개발하는 오사카대학의 안제스MG(AnGes-MG)가 작년 9월에 대학발 VB로는 처음으로 도쿄증권거래소에 입성했다. 유전자 파괴 마우스를 제작하는 구마모토대학의 트랜스제닉(Transgenic)도 12월에 그 뒤를 이으면서 어두운 일본경제계에 작지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닛케이산교신문이 최근 전국대학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대학 교수에 의한 ‘교원 VB’만 해도 전국적으로 250개(2002년 12월 기준)가 넘고 있다. 이는 전년대비 2.2배 증가한 것으로 2년 연속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교원 VB를 가진 학교수도 총 83개교로 전년도에 비해 28개교가 늘었으며, 관련 교수만도 295명에 달하고 있다.
대학별 교원 VB 상황을 살펴보면, 먼저 한국에도 많이 알려져 있으며 개혁적 성향의 대표적 명문사립인 와세다대학이 총 21개로 최대 교원 VB수를 자랑하고 있다. 보수 성향의 또 다른 명문사립 게이오대학이 15개로 이 뒤를 이었다.
사립대에 수위 자리를 빼앗기긴 했지만 일본교육의 자존심 도쿄대(9개)를 비롯하여, 교토대(8개), 히로시마대(7개), 오사카대(6개) 등 국공립대학들도 막강한 교육 인프라와 재정을 이용, VB 육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IT전문대학인 도쿄이과대학(2002년도 현재 교원 VB는 총 8개)은 올해 내로 교내 VB를 20개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단단히 벼르고 있다. 이를 위해 지난 1월에는 교내에 과학기술센터를 발족했으며, 오는 3월에는 특허출원 및 이익분배를 전문적으로 관리할 지적재산본부를 과학기술센터 산하에 신설, 잠자고 있는 지적재산을 적극 발굴해 이를 사업화한다는 계획이다.
발명자 30%, 해당 연구실 30%, 대학당국 40%라는 구체적인 수익배분까지 이미 정해 놓은 상태다.
이처럼 각 대학이 VB 육성에 발벗고 나서는 것은 “우수한 지적능력들이 그동안 대학 연구실에서 썩고 있는 바람에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는 반성이 주된 이유다.
여기에 국공립대학들의 경우에는 방만한 학교운영을 최대한 슬림화하고 이론에 머물기보다는 실용학문을 중점 육성한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사립대학들은 국공립대학에 비해 국가의 재정지원이 적어 날로 심각해져 가는 경영난을 스스로 해결하고 대학간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돈되는 비즈니스’로서 VB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각 대학들은 VB 환경조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지금까지 대학발 VB의 경우 재단법인 과학기술진흥회 등 주로 외부조직이 사업성 판단에서 관리까지 도맡아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자체 연구성과를 비즈니스모델(BM)로 승화시키기 위한 이른바 ‘기술이전기관(TLO)’을 교내에 설립하는 대학이 급증하고 있다. 2002년 12월 현재 TLO를 보유하고 있는 대학은 총 45개교로 전년대비 12개 학교가 늘었다.
◇각 대학 MOT 프로그램 개설 붐=경영학 석사과정인 MBA는 귀에 익숙하지만 ‘MOT’라는 용어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MOT란 ‘Management Of Technology’의 머리글자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기술경영’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MBA가 기존사업 경영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경영학 석사과정이라면, MOT는 고도의 기술혁신에 따른 신규사업 창출에 요구되는 새로운 경영 노하우를 익히는 ‘이공계의 경영학 석사과정’인 셈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MOT 프로그램이 최근 일본의 각 대학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작년 4월에 도호쿠대가 공학연구과내에 ‘기술사회 시스템’이라는 코스를 열어 이미 첫 테이프를 끊었다. 이어 도쿄대가 오는 4월에는 이학연구과에 ‘테크놀리지 메니지먼트’라는 코스를 개설하는 등 올해만 해도 5개 대학에서 MOT 전문대학원이 생길 예정이다.
대부분의 MOT대학원이 이공학 계열내에 개설되는 것도 한 특징이다. 하지만 MBA과정의 일부 프로그램으로서 MOT를 도입하는 대학들도 늘고 있다. 기술혁신을 사업화할 수 있는 경영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두 개념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논리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규슈대과 와세다대의 비즈니스 스쿨이다.
특히 오는 4월에 개설하는 와세다 비즈니스 스쿨은 현재 중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칭화대의 경제관리학원과 MOT 프로그램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고 있다. 중국의 대학들은 인큐베이션이라는 개념보다는 대학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공장이자 기업이라 할 정도로 중국 방문시 깊은 인상을 받은 오쿠시마 전 총장의 의지가 양 대학의 MOT교류를 맺게 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일본 대학들이 MOT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뛰어난 기술력으로 승승장구하던 일본경제는 90년대 후반부터 국제 경쟁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등 맥을 추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 일본은 바로 ‘MOT 능력의 부재’로 자가 진단하고 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소(IMD)의 조사결과도 이를 잘 뒷받침해 준다.
이 연구소는 2000년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일본의 지적재산권 수준은 세계 1위, 연구개발 능력은 세계 2위, 그러나 연구개발을 십분 사업화할 수 있는 ‘기술경영 마인드’는 세계 19위 정도로 평가했다. 뒤늦게나마 MOT 인재육성에 박차를 가하는 이유가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실제로 각 대학의 MOT 프로그램은 기존의 여타 교육과정과는 다르게 가히 파격적이라 할 정도로 많은 차이를 보인다.
먼저 주 교육대상이 젊은 학생들은 물론 직장인을 포함한 일반인에게도 널리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다른 교육과정보다 학비가 비싸서 젊은 학생들보다는 주머니가 두둑한 직장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야간이나 주말에 개설되는 프로그램이 많아 평일에는 시간이 없는 직장인들을 배려하기도 한다. 직장인들은 다소 투자를 해서라도 철저히 기술경영에 대해 재무장해 자신이 ‘MOT 인재’라는 꼬리표 달기를 원한다.
또한 일본IBM 등 유수 민간기업의 전문가를 교수로 초빙, 철저한 현장경험을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커리큘럼이 많은 것도 인기를 끄는 이유다. 이는 뛰어난 연구개발 능력에 비해 비교적 떨어지는 경영능력을 대학원생들에게 철저히 익히게 해 첨단 테크놀로지 시대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전천후 인재양성’에 그 목적이 있다.
당초 MOT대학원은 80∼90년대 미국 경제를 부흥시킨 원동력이었다. 현재에도 MIT대학을 비롯해 100개 이상의 대학에서 MOT 코스를 운영, 연간 1만명 가량의 MOT 인재가 미국에서는 배출되고 있다. 관련자들은 “이에 비해 일본은 너무나 미흡한 수준이며 앞으로 적어도 100개 이상의 대학원과 연간 4700여명 정도의 인재가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산관학(産官學) 교류 활발=이러한 대학의 ‘실학(實學) 열풍’에 정부와 민간기업들도 적극 가세하고 있다.
정부내 경제산업성은 MOT전문가 육성에 가속도를 가하기 위해 ‘행정지원’ 의지를 내비쳤다. 이 일환으로 ‘기술경영 프로페셔널 스쿨’을 3월 개교한다고 닛케이산교신문이 최근 보도했다. 이 학교는 산관학 컨소시엄 형태로 구성되며 현재 80여개의 민간기업과 30여개의 대학이 참가의사를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뿐 아니라 경산성은 대학발 VB를 지원하기 위해 인큐베이션 시설을 각 지역 주요대학 근처에 설립할 예정이다. 이러한 노력은 결과적으로 교육계와 그 지역 산업계를 잇는 다리 구실을 해 지역발전에도 크게 공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긴키경제산업국도 마쓰시타전기, 산요전기, 교세라 등 20개사와 함께 관내 약 30개 대학 VB에 인재를 무상으로 파견, 아직 영세한 VB의 시장참여를 측면지원하기 위한 클럽을 결성했다.
여기에 국가의 막대한 막대한 교육예산 투입에 비해 그 실효성이 의문시되어 심지어 폐지론까지 대두되는 도쿄대도 명예회복에 나서고 있다. 먼저 혼고캠퍼스에 ‘산학연대 추진실’을 곧 오픈한다. 여기에서는 그동안 각 학부나 연구과(한국의 대학원에 해당)에 흩어져 있던 산학 공동연구를 인문사회계열과도 연계하는 학제적(學際的) 프로세스를 적용시킨다. 문도 열기 전에 이미 노무라증권과 ‘산학연구 모델’ 개발을 위해 향후 3년간의 계약으로 제휴했으며, 미쓰비시종합연구소와는 ‘산학지원시스템’ 개발을 위해 손을 잡는 등의 수완을 발휘했다.
도쿄대 생산기술연구소에서도 산학협동이라는 추세와 내년봄 시행될 국립대학의 법인화에 발맞춰 체질 개선에 나서고 있다. 기초연구만이 아니라 산업응용 및 시장개척 등을 연구대상에 포함하는 등 경영관리부문을 대폭 강화시키면서 산학협동의 가교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대학간의 교류도 활성화되고 있다. 게이오대, 일본대, 쇼우난공과대, 분쿄대 등 4개교가 공동 컨소시엄을 통해 상시 연락회를 설치, 각자가 강세를 보이는 분야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는 등 교류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다.
협력 분야에 있어서도 정보기술(IT)은 물론 바이오기술(BT), 게놈, 나노기술(NT)까지 다양하다. 산요전기는 이와테 현립대학과 공동으로 원격진료 시스템을 구상중이다. 야마가타대학은 지역 주부들과 함께 ‘러브 라이스(LOVE LICE)’라는 빵을 개발 생산하는 주부 VB를 설립하기도 했다.
한편 전자의 거리 아키하바라에는 재개발 차원으로 JR아키하바라역 근처에 초고층 빌딩 2동이 오는 5월에 착공된다. NTT도시개발 등이 사업주인 이 빌딩이 완성되면 ‘일본내 최고의 IT 거점 건설’이라는 당초 취지에 걸맞게 대학의 기술이전기관(TLO) 등 산학 관련기관 및 IT기업들이 입주대상 1호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처럼 날로 증가하는 산관학 공동연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특허화, 사업화로 성사된다는 것은 아직도 요원한 ‘희망사항’처럼 보인다. 전국의 대학중 655건이라는 최다 특허수를 자랑하는 가나자와 대학이 실제 실용화한 산학연구는 고작 2건밖에 안된다는 닛케이산교신문의 보도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학기술입국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상아탑’이 아직 튼튼한 자생력과 경영 노하우를 가지지 못한 상황에서 장기적 불황의 늪에서 빠져 나올 줄 모르는 일본경제에 실낱같은 기대를 주기에는 아직 힘겨운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