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번 결정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동안 미 상무부가 하이닉스반도체를 대상으로 고율의 상계관세를 부과할 것이라는 예상을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 예비판정(57.37% 부과)은 단순한 경고 이상의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달말로 예정된 유럽연합(EU)의 예비판정 결과도 예상키 어렵게 됐다. 미국과 EU가 세계 최대 D램 생산국인 한국을 상대로 연합 공격을 개시한 것 같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미 상무부의 이번 결정은 마이크론테크놀로지의 제소를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 정부의 해명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하이닉스 금융지원에 대해 채권단의 자율적·상업적 조치임을 강조했다. 정부의 은행지분소유에 대해서는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발생한 일시적 현상이라는 점을 들어 이해를 구했다. 우리 정부의 대응논리가 수세적이고 빈약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이번 미국측 태도는 단호함을 다시한번 확인시켜줬다.
이로 인해 하이닉스는 현재의 D램 수출물량을 감안할 때 당장 미국에 월 290억원 가량의 예치금을 물어야 할 판이다. 이달말 EU측에서도 예상대로 30% 정도의 관세부과 판정을 내릴 경우 하이닉스의 예치금 규모는 350억원 규모로 늘어난다. 하이닉스는 올해 1억달러를 투입해 미국 유진공장의 생산능력을 확충한다고 하지만 이 공장이 제기능을 발휘하려면 6개월 정도 소요된다. 관세를 피하기 위해 IBM·HP 등 PC업체들의 동남아 및 중국 현지공장에 D램을 수출하거나 대만 주기판(마더보드)업체들에 D램을 공급한 후 마더보드 번들형태로 미국시장에 들어가는 방안 등을 강구하고 있지만 이 또한 미국측이 다른 형태의 시비를 걸어올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우리 정부가 발벗고 나서야 한다. 막연하게 ‘유감’을 표시할 게 아니라 국제사회의 룰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시급하다. 미국 정부가 9·11테러 이후 자국의 항공업체들에 수십억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하고도 왜 그렇게 떳떳한지, 하이닉스의 주요 경쟁업체 중 하나인 인피니온에 독일의 막대한 지원이 이뤄졌는데도 어떻게 잠잠할 수 있는 것인지 등을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밑바닥부터 샅샅이 훓어나가다 보면 통상협상의 새로운 물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뒤로만 밀릴 게 아니라 공격할 만한 빌미를 찾아내야 한다.
당장 오는 21일부터 미 상무부의 실사가 시작되는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 우선 보조금 무혐의를 입증하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와 같은 최종판정 이후의 수단도 지금부터 강구해야 할 것이다. 마이크론과 인피니온을 상대로 한 국내 기업의 역상계관세 제소를 활용하는 방안도 준비해야 한다. 이번 미국의 조치가 경제 외적인 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시각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배경이 어찌됐든 우리 정부는 하이닉스 문제에 관한 한 손놓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이닉스 매각에 대한 찬반 논란만 일으키다가 주주와 채권단, 그리고 국내경제에 부담만 안겨줬다. 마이크론과 하이닉스 인수협상이 지난해 4월말 결렬된 후 독일 인피니온이 재빠르게 한국산 D램에 대한 상계관세 부과를 요구하며 EU에 제소하고 마이크론이 그 뒤를 이었는 데도 우리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래저래 유비무환의 아쉬움만 남는다. 늦었지만 참여정부의 근본적인 처방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