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 싸움은 이제 그만! 생존을 위한 협력이 시작됐다.’
상호비방, 거짓말, 뒤통수 치기, 발목잡기 등 온갖 부정적인 수식어로 가득했던 통신판에 최근들어 ‘코피티션’이 화두로 등장했다.
통신회사들은 협력(cooperation)과 경쟁(competition)이 합성된 ‘코피티션’(Co-Petition)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유행시키며 ‘이전투구’로 물든 과거와 단절을 시도하고 있다.
통신판의 새로운 바람에 대해 ‘언제까지 갈까’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아직 많다. 그러나 코피티션의 기류가 최근들어 실례를 만들어 가면서 새로운 경영풍토로 정착하고 있다.
◇코피티션이란=‘코피티션’이란 협력과 경쟁의 장점을 결합시키는 전략적 비즈니스 이론이다. 이 용어는 미국 예일대 베리 네일버프 교수와 하버드대 애덤 브란덴버거 교수가 지난 96년 ‘코피티션’이라는 제목의 책을 공동 저술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업종별로 경쟁기업간 제휴가 늘어나는 현상을 경영학적으로 분석했다.
이 말이 일반화된 것은 소프트웨어회사인 노벨사의 레이몬드 누어다 전 사장이다. 그는 인터넷 바람이 불던 시절, 신생업종의 시장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는 우선 경쟁기업들이 제휴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각각의 몫을 늘리는 경쟁보다는 시장 전체를 키우는 것이 선행돼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코피티션은 한마디로 말해 ‘윈윈’ 전략에 기초한 것으로 반드시 패자가 있어야 승자가 있다는 도식적 논리를 부정하고 비즈니스 게임에서 참가자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적과의 동침 사례=통신시장의 맞수인 KT측과 SK그룹측이 손을 잡고 신상품을 내놓아 화제를 낳고 있다. KTF가 경쟁사인 SK텔레콤의 관계사 SK(주)와 제휴해 전국 3700여개의 SK주유소, 스피드메이트, OK마트 등에서 사용할 수 있는 ‘SK-K머스 상품권’을 선보인 것이다. 사소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SK측과 KT측이 공동 상품을 내놓은 것이다.
이에 앞서 KTF와 SK텔레콤은 2㎓대역 네트워크 일부를 공동으로 구축, 중복투자를 막고 효율성을 높인다는 데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LG텔레콤은 KTF의 지방소재 기지국을 사용중이며 SK텔레콤의 모바일 결제시스템을 채택해 시장 키우기에 들어갔다.
또 SK텔레콤·KTF·LG텔레콤 등 이동전화 3사는 지난 6일부터 멀티미디어메시징서비스(MMS) 상호연동을 실시했다. 그동안 서로 문자메시지는 보낼 수 있었지만 사진메일·동영상 등은 전송이 불가능했다. 한 통신회사 관계자는 “MMS 연동이 실시됨으로써 MMS 시장이 팽창, 명실상부한 ‘킬러 애플리케이션’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유선사업자들도 상생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KT·하나로통신·두루넷·온세통신·데이콤 등 초고속인터넷사업자들은 지난 4월초부터 이른바 ‘클린마케팅’을 선언했다. 가입자 유치시에 설치비면제, 6개월 무료 사용 등 제살깎기 경쟁에서 벗어나 약관대로 마케팅을 하자는 것이 골자다.
한 후발사업자 관계자는 “언제까지 지켜질지 모르지만 현재는 잘 지켜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후발사업자들의 상황이 조금 나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잘 될까=사업자들이 협력으로 선회한 것은 이제 더이상 유치할 가입자가 없기 때문. 시장포화 상황에서 남의 가입자 뺏기에 주력하다보면 서로 출혈만 심해질 뿐이다. 남은 것은 가입자 일인당 매출을 높이고 제휴를 통해 시장을 키우는 방법뿐이다.
남중수 KTF 사장은 “코피티션은 개별 기업측면에서의 비용절감과 시장확대를 가능케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기업가치를 증대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이뿐 아니라 산업측면에서는 타 산업과의 협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도록 함으로써 산업의 전반적인 매력도를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최근 일련의 움직임이 일시적인 게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 통신업계 경쟁 도입 10년동안 사업자들이 서로에게 준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한 후발사업자 관계자는 “그동안 약속을 지킨 회사만 결국 손해를 본 적이 많았다”며 “각종 제휴를 통해 협업이 현재는 잘 이뤄지고 있지만 약속이 언제 깨질지 불안한 상황”이라고 실토했다.
코피티션이 새로운 경영 트렌드로 자리잡으려면 영업전선에 있는 회사의 구성원까지 ‘협력에 기초한 경쟁’ 개념을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한 통신회사 관계자는 “최고위 임원들은 변하는 모습이지만 실무선까지 완전히 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요즘 국내 통신시장이 사상 최대 위기에 빠졌다는 분석이 많다. 코피티션이 단순한 유행으로 그칠지, 국내 통신업계 경쟁상황을 한단계 도약시키는 ‘마법의 주문’이 될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김규태기자 star@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