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융의 (서울의대 교수, 피지옴 연구회회장) earmye@snu.ac.kr
인간게놈프로젝트가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그러면 이제 인간에게 발생하는 많은 질병의 원인을 알게 되고 그 치료법이 곧 밝혀지게 되느냐고 말이다. 과연 그럴까. 대답은 그렇지 않다. 사실은 인간의 질병 정복을 위한 대장정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어쩌면 간단하고 이미 예견됐다.
유전체학자들은 장밋빛 청사진을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과장되게 말한 것이다. 생명현상은 기본적으로 유전자 정보에 의해 만들어진 단백질이 기능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여러 단백질이 세포를 이루고 세포는 장기를 이루며 이런 장기들이 계통을 이루어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상상을 초월해 복잡하다.
다시 말하면 분자 크기에서 인간의 키에 이르는 공간적 사실을 설명해야 하고 또 분자의 움직임에서부터 인간의 수명에 이르는 긴 시간적 현상을 설명해야 한다. 이러한 생명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복잡성 때문에 현재의 지식으로는 이해가 어렵다.
생명현상의 복잡성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바로 발달된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해 컴퓨터 상에서 생명현상을 구축하고자 하는 피지옴 기술이다. 피지옴(physiome)은 생명을 의미하는 피지오(physio-)와 전체를 의미하는 옴(-ome)이 합쳐진 새로운 합성어다.
피지옴은 수천, 수만의 생명현상을 정보기술을 이용해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가상장기과 가상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생명기술(BT)+정보기술(IT)’의 융합기술이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기존의 많은 실험정보를 모으고 정리해서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고 나아가 시뮬레이션에 필요한 정량적 실험자료를 확보, 수식화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모델이 만들어지지만 아무 모델이나 다 유용한 것은 아니다. 가장 적절한 데이터를 이용해 만든 모델만이 생명 현상에 근접한 피지옴 모델이 될 수 있다.
모델은 간단한 가상세포에서 시작해 가상장기, 가상인간까지 도전하는 여러 단계가 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가상인간이다. 이를 위해 국제적으로 인간 피지옴 사업(human physiome project)이 구성돼 현재 부분적으로 진행 중에 있다.
현재 가장 발전을 보이고 있는 모델로는 가상 인슐린 분비세포와 가상심장이다. 이런 가상세포, 가상장기는 신약개발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될 도구가 되고 있다.
생체 분자, 세포, 조직의 정량적인 정보를 집약해 가상세포, 가상장기를 만들고 세포에 대한 약물정보를 넣으면 약의 효능과 부작용을 테스트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피지옴을 이용하면 동물실험과 임상시험의 기간과 비용을 대폭 줄일 수 있다는 말이다.
미국 FDA는 이런 피지옴 모델을 이용해 얻은 신약검사 결과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앞으로 모든 신약개발에서 피지옴 모델을 사용하는 인실리코(in silico) 시험을 의무화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 피지옴 연구는 단지 신약개발에서만 유용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응용 가능성이 있다.
유전정보, 단백정보, 세포정보, 장기정보, 개인정보 등 각 수준에서 얻어진 정보를 집대성하면 개인의 맞춤의료가 가능해진다. 개인별 질병 발생을 예측하고 개인의 체질에 맞는 치료가 가능해진다.
나노기술(NT)과 합한 나노센서는 이제까지 불가능하였던 생체정보를 더 자세히 얻을 수 있고 그 결과 더욱 완전에 가까운 가상장기, 가상인간의 구축이 가시화될 수 있게 된다.
또 나노 로봇은 질병의 진단과 치료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세계는 바야흐로 IT와 BT, NT의 융합과학, 융합기술에 의한 가상인간의 시대를 향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