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포스트PC 시대

◆배일한 bailh@etnews.co.kr

 요즘 PC업계를 보면 좁은 우리에서 아사지경에 빠진 맹수들이 서로 잡아먹으려 싸우는 ‘동물의 왕국’을 연상케 한다. 시장침체가 수년째 계속되면서 PC업계에 통용되는 게임의 법칙은 오직 더 싼 가격으로 소비자를 유인하는 출혈경쟁만이 남았다. 올들어 유명 대기업까지 체면 불구하고 가격파괴에 나서면서 상당수 중소 PC업체들이 고사위기에 처한 실정이다. 비교적 시장점유율이 높다는 메이저 PC업체들도 앞으로 벌고 뒤로 나가는 적자구조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감원바람에 휩싸인 PC업체 주변에서는 저녁마다 울분에 섞인 술판만 거나할 뿐 새로운 차세대 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나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 향상 같은 미래에 대한 건설적 대안은 거론되기도 힘든 분위기다. 경기가 워낙 어렵다보니 애써 개발한 새로운 컨셉트의 PC제품도 경쟁업체들의 저가공세에 파묻혀버린다.

 회사마다 제살깎기식 가격경쟁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국내 PC산업의 앞날이 암담해보이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99년에 엄청나게 보급된 인터넷PC의 기계적 수명이 한계에 달하고 있어 내년에는 어떻게든 대체수요가 다시 한번 불붙을 전망이다. 또 정통부가 내세우는 한국경제의 신성장엔진으로 기존 PC제품의 사촌격인 포스트PC가 당당히 선정됨에 따라 사양길로 치부되던 PC산업 자체의 미래전망도 그리 나쁘게 볼 이유는 없어졌다. 태블릿PC·개인휴대단말기(PDA) 등 포스트PC시장을 열기 위해서는 그동안 IT시장을 주도해온 기존 PC업계의 전국적 판매망과 개발능력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거국적으로 보급됐던 인터넷PC의 대체수요가 일어나고 포스트PC시장이 열리는 그날까지 국내 PC업체들이 살아남도록 돕는 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부가 포스트PC 분야 연구개발을 위해 PC업체를 몇군데 선정해서 공동연구사업이라도 시작하길 바란다. 지금 PC업계에서는 아까운 연구인력들이 줄줄이 빠져나가면서 기술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다. 국내 PC업계에 포스트PC시대의 희망을 불어넣는 일에 정부가 망설일 이유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