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은 아직도(?) ‘전자제품=일제’라는 의식이 강하다. 최근 값싼 중국 전자제품이 아키하바라를 야금야금 잡아먹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고급은 일제, 저가품은 중국제’일 뿐이다. 그래서 ‘품질 좋고 값도 싼’ 이미지로 일본 시장을 노렸던 한국제품이 고전했던 시절도 있었다.
특히 전자제품의 꽃, TV에 대한 국산품 사랑은 각별하다. 일본이 최대 시장을 이루고 있는 LCD TV분야에서 일본 메이커가 유리한 것은 아주 당연하다. LCD TV업체인 샤프는 이런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안고 지난해 전세계 절반이 넘는 시장점유율을 차지했다.
일제 TV가 최고급이라 믿는 일본인이 들으면 무척 자존심 상할 일이 있다. 지난해 11월 첫선을 보인 후 한때 40%가 넘는 히트를 친 소니의 30인치 LCD TV 얘기다. TV의 얼굴인 패널이 바로 일제가 아닌 한국제(LG필립스LCD)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올 3월 마쓰시타가 내놓은 32인치 LCD TV도 한국제(삼성전자) 패널을 썼다.
일본 언론은 “TV의 명가 소니와 거대한 판매력으로 세계 TV시장을 제압했던 마쓰시타마저 이젠 한국에 의지해야 하는 형편”이라며 개탄한다.
박막형 TV에서는 D램 반도체처럼 한국에 무너질 수 없다는 일본이 지금 한국·대만과 정면승부를 걸고 있다.
일본측 대표는 히타치, 소니, 마쓰시타 등 왕년의 멤버 대신 새로운 선수로 구성됐다. 샤프, 파이어니어, 산요가 그들이다.
“올해도 LCD TV에서 50% 세계 점유율을 지킬 것”이라는 샤프의 사지 부사장은 TV용 LCD 제조사업이 가장 남는 장사인 이 부분만큼은 한국에 내줄 수 없다고 말한다. 내년부터 가동에 들어가는 1000억엔(한화 약 1조원)짜리 LCD TV 전용공장 ‘가메야마’는 이런 샤프의 자존심이다.
“PDP에 사운을 걸겠다”는 파이어니어의 이토 사장에게선 자못 비장미까지 느껴진다. 파이어니어는 97년 세계 최초로 PDP TV를 만든 개척자다. 비록 매출규모는 히타치의 PDP TV에 밀리지만 여전히 40인치 이상 최고급형 매출에서 1위다. 고급형 TV는 ‘메이드 인 재팬’이어야 한다는 옛 명성 수호의 최일선에 섰다.
“유기EL을 한발 앞서 양산해 차세대를 노린다”는 구와노 산요 사장도 야심을 키운다.
‘포스트액정’의 0순위 유기EL로 ‘평판디스플레이패널’ 판을 뒤집는 꿈을 꾼다. 산요는 지난 2월 코닥과 함께 액티브형 유기EL 양산에 들어가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등 소형액정 시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들 3총사 뒤에는 함께 시장쟁탈전을 벌일 상대이자 일본의 자존심을 지킬 동지이기도 한 마쓰시타, 도시바, 히타치, 소니라는 네 명의 거인이 있다. 또 TV를 사랑하는 돈많은 정부가 지원에 발벗고 나서고 있다. 일례로 경제산업성은 올해 PDP업체 4군데를 모아 차세대 PDP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매년 들어가는 경비 200억원 중 절반은 정부 주머니에서 나온다.
일본은 이제 한국이란 적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고 자신의 입장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너무 잘 나가는’ 우리 LCD산업을 맘편히 보기엔 그들이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