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램업계는 지금 러시안 룰렛을 돌리고 있다.
2위인 미국 마이크론을 비롯해 독일 인피니온, 대만 난야테크놀로지까지 모두 살얼음판 위에 서 있다. 우리나라의 하이닉스도 예외는 아니다. 망할 회사는 빨리 없어져 줘야 나머지가 숨통을 틀 수 있다는 논리다. 하이닉스를 향한 미국과 유럽의 상계관계 부과도 러시안 룰렛와 다름 없다.
무대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1순위로 꼽히던 업체가 바로 일본 엘피다메모리다. 엘피다는 99년 12월 일본 NEC와 히타치가 D램부문을 통합해 출범시킨 회사다. 올해 미쓰비시전기의 D램부문을 받아들여 현재 유일한 일본 D램업체다. 전세계 D램시장 4%를 차지하고 있는 약자다.
D램 역사를 쓴다면 엘피다는 비운의 마지막 황제 푸이에 비견될 법도 하다. 일본 D램산업은 80년대 시장의 80%를 장악했던 황제였다. 특히 엘피다의 전신 중 하나인 NEC D램사업부문은 85년부터 7년간 세계 1위를 기록한 업체이기도 했다. 신흥강자·삼성전자의 뒷그림자엔 이들 일본 D램업체들의 추락이 숨어있다.
이런 엘피다가 지금 ‘히노마루(일장기) 반도체’ 부활을 말한다.
최근 인텔·히타치·NEC 등으로부터 1128억엔(1조1280억원) 조달에 성공했다. 위기에 처한 엘피다호의 조타수를 잡은 사카모토 유키오 사장은 “점유율을 내년에 15%까지 끌어올려 3강에 설 것”이라며 자신만만해 한다. 일단 이번에 들어온 돈으로 히로시마의 300㎜ 웨이퍼 공장의 생산능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게 됐다. 내년에는 증시 상장을 통해 다시 한번 돈을 끌어모을 계획이다.
여기에다 인텔과의 기술제휴 관계까지 과시한다. D램 러시안 룰렛을 즐기는 인텔이 엘피다를 최적의 카드로 활용할 것이란 계산이다. 인텔은 D램 가격을 낮게 유지시켜 자신들이 CPU를 비싸게 팔아도 PC가격은 오르지 않아야 한다는 명제에 충실하다.
엘피다로서는 인텔이 삼성전자의 견제를 위해 자신들을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의도대로 움직여주며 득을 얻겠다는 것. 게다가 PC 이외에 사용되는 D램에 대한 자신감도 녹아있다. 엘피다가 최근 양산에 들어간 동작전압 0.7볼트의 차세대 제품이 이를 말해준다. 사카모토 사장은 “우리들은 PC에서 압도적으로 강한 삼성전자와 대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휴대폰, 지상파 디지털TV, DVD 등 새로운 수요에 승부를 걸어보겠다는 전략이다. 애널리스트들은 “일본 내 고객기업이 많은 비PC분야 개척은 정공법”이라고 평가한다.
일단 일본 동료 기업들의 호응이 뜨겁다. 약자로 몰린 일본 D램을 이대로 방치해선 안된다는 암묵적 동의가 이뤄지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사설에서 ‘일본이 세계 디지털가전 시장을 재패키 위해선 첨단 D램기술을 일본에서 키워야 한다’ ‘엘피다는 디지털가전 D램시장을 개척해 다른 일본 메이커들이 지갑을 열게하는 것이 목표’라는 등 은근히 이런 분위기를 부추긴다.
일본의 이런 기대를 담기라도 한듯 엘피다는 본래 그리스어 ‘엘피스(희망)’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엘피다 부활 시나리오가 무르익어가는 이때 이어지는 질문이 있다. 일본 D램이 부활한다면 러시안 룰렛의 희생자는 누가되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