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사무용소프트웨어연합회인 BSA(Business Software Alliance)가 시장조사기관인 인터내셔널플래닝&리서치(IPR)에 의뢰하여 조사·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작년 한해 동안 우리나라 사무용 소프트웨어(SW)의 불법복제율은 50%에 육박하며 그 피해손실액만도 4억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세계평균(39%)보다도 높은 수준으로 20∼30%대인 미국·일본 등과 비교해볼 때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와 비슷한 경제규모를 가진 싱가포르(48%), 대만(43%)보다도 그 정도가 심각한 것이다.
BSA가 발표한 수치자료의 정확성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는 다른 국가들과의 상대적인 비교만으로도 세계 무역규모 12위의 경제대국이자 IT강국이라는 우리나라의 ‘국가 브랜드’에 걸맞지 않으며, 차세대 국가 성장동력이자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열 테마의 하나로 SW산업을 꼽고 있는 정책방향과도 부합하지 않는 수치다. 이러한 결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SW 불법복제 사용에 대해 우리는 매우 이율배반적인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모두가 SW산업 보호와 국가적 차원의 진흥정책을 역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SW를 무단으로 복제하여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SW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부터 ‘불법복제하여 쓰는 SW의 대부분은 외국산이므로 국익에 반하지 않는다’는 국익(國益) 옹호론까지 불법복제의 이유는 다양하지만 너무도 근시안적인 발상들이다.
기술혁신의 단계를 넘어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은 정보기술(IT)이 우리나라에 도입되기 시작한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SW를 주로 수입하여 사용하는 수입국의 입장이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디지털콘텐츠산업과 함께 자동차·반도체의 뒤를 이어 차세대 우리나라 최고의 수출품목으로 꼽을 만큼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최근 중국에 진출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온라인게임 ‘미르의 전설 2’가 중국내 불법복제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어 저작권 침해에 강력히 대처하겠다고 나선 것도 우리의 달라진 위상을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이러한 위상에 걸맞은 의식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관련 산업계는 물론 정부 또한 산업정책적 차원에서 그리고 정보문화정책적 차원에서 적극적인 홍보와 캠페인, 교육 등에 힘써야 할 것이다. 얼마 전 불법복제 단속 공무원에게 사법경찰권을 부여하도록 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공포된 것도 이러한 국가적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민 개개인의 의식전환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과 지원이 있다 하더라도 타인의 지적재산의 가치를 인정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자발적인 동참이 없다면 그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의식의 전환이 없는 도약은 다시 제자리로 내려서는 널뛰기와 다를 바 없다.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IT혁명’은 바로 그러한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알리는 문명적 대전환의 징후들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 ‘의식의 대전환’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변방의식으로부터 중심의식으로 대전환을 해야 한다. 자기 목소리는 중심의식의 표현이다. 중심의식을 가진 사람만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으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만이 새 문명의 향방을 결정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역사의 주인공은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중심의식을 가지고 창조적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에게 새 역사의 운행은 맡겨져 있다.
지금부터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성숙한 IT문화의 씨가 제대로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을 고르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토양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씨를 뿌린다 하더라도 제대로 자라 꽃을 피울 수는 없을 것이다.
‘갈택이어(竭澤而魚)’라는 말이 있다. 연못을 말려 고기를 얻는다는 뜻으로 보통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먼 장래는 생각하지 않는 것을 가리킬 때 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고사에서 유래된 것이다. 진(晋)나라 문공(文公)이 성복이라는 곳에서 초나라와 일대 접전을 하게 되었으나 승리할 방법을 찾지 못하던중 호언(狐偃)의 제안대로 속임수를 쓰려 하자 이옹(李壅)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어 물고기를 잡으면 잡지 못할 리 없지만 그 훗날에는 잡을 물고기가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작은 것에 집착하여 큰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가? <윤석근 프로그램심의조정위원장 sky@pdm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