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자재(時空自在)’
국어순화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주된 화두다. 특히 ‘가타카나’를 활용해 어떤 외국어도 순식간에 외래어로 둔갑시키는 일본의 외국어 오염이 심각하다. 일본 국립국어연구소는 지난 5일 외래어를 일본어로 바꾸자며 몇몇 대표적인 사례를 손꼽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시공자재’, 원어로는 유비쿼터스(Ubiquitous)다.
국어순화를 외치는 측에서는 하나라도 더 일본어답게 고치고 싶겠지만 IT산업에 종사하는 엔지니어들은 고개를 갸우뚱할 터다. 한자 뜻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자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자유롭게 (컴퓨팅 혹은 네트워크에) 접속해 이용하는 세상’을 뜻할 법도 하다.
그만큼 일본에선 유비쿼터스가 유명세를 타고 있다. 단적인 예로 공영방송인 NHK가 사카무라 겐 교수 특집 다큐멘터리를 제작·방송한 것을 들 수 있다. 사카무라 도쿄대 교수는 트론(TRON:The Real time Operating system Nucleus)으로 불리는 OS를 만든 아키텍처 개발자이자 일본 유비쿼터스ID센터와 T-엔진 포럼을 이끄는 이 분야 선구자다. 지난해 아사히신문은 그의 인터뷰를 두 면에 걸쳐 실었다.
일본 기업들도 떠들썩하기는 매한가지다.
일본 1위 전자업체인 히타치가 유비쿼터스추진센터를 설립한 것을 비롯해 소니의 유비쿼터스기술연구소, 리코의 유비쿼터스솔루션연구소, 후지쯔의 유비쿼터스사업추진부, 미쓰비시전기의 유비쿼터스영상기술부, 후지제록스의 유비쿼터스미디어사업개발부 등 다 열거하기도 쉽지 않을 정도다. 심지어 세계 3위 반도체업체인 르네사스테크놀로지는 지난 4월 첫 출범 일성으로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실현을 향하여’를 비전으로 내세웠다.
지난 4월 방한한 사카무라 교수가 기자에게 일본 내 유비쿼터스 붐이 다소 과열됐다고 걱정할 정도다. 아키텍처 개발자인 그로서는 ‘뭐가 유비쿼터스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남들 따라 덩달아 떠드는’ 분위기가 조금 못마땅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이런 기업과 언론의 과열(?)된 성원은 힘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동안 줄곧 미국 오토ID센터가 이끌던 RFID(전자태그) 표준을 올해 갓 생긴 일본 유비쿼터스ID센터가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유비쿼터스ID센터에는 NEC, 히타치, NTT, 돗판인쇄 등 일본 대형 전자·통신·인쇄분야 170개사가 참여하고 있다.
일본 정부도 발벗고 나섰다. 최근 발표한 국가 IT전략 ‘e재팬전략Ⅱ’ 안에는 ‘차세대 정보통신기반 정비-언제 어디서나 무엇이든 연결 가능한 유비쿼터스 네트워크 형성’이란 항목이 명시돼 있다. 유비쿼터스를 국가전략으로 채택한 세계 첫 사례로 기록되는 셈이다. 노무라연구소의 무라카미 데루야스 이사장이 일본 대부분 부처에 유비쿼터스 연구회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공무원들의 지지와 관심도 뜨겁다. 이미 올해 예산안에 유비쿼터스 항목이 들어있다.
혹자는 유비쿼터스 컴퓨팅 분야에서 IT인프라가 강한 한국이 세계를 선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또 차세대 패러다임인 만큼 지금부터 총력전을 펼치면 우리야말로 명실상부한 유비쿼터스 강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총력전에 들어간 일본을 생각하면 한발 뒤처진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우리나라에 유비쿼터스란 단어를 이해하고 이를 순우리말로 바꾸겠다는 의욕에 찬 국어학자가 얼마나 될까.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한 ‘시공자재’를 보며 마냥 웃어넘기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