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전화와 초고속인터넷 서비스의 괄목할 만한 성장으로 지난 2∼3년간 세계적인 통신산업 침체의 여파에서 비켜 있던 우리나라의 통신시장도 최근 활력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선시장은 음성전화 서비스의 매출 감소가 두드러지고 있으며, 초고속인터넷 시장 역시 성장세가 둔화되고 있다. 이동전화도 가입자 수가 3000만 명을 넘어서면서 음성통화의 성장은 정체를 보일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실은 유무선 통신사업자들이 새로운 수익원 발굴에 몰두하도록 하고 있다. 유무선 통신, 위성, 방송망과 연결된 다원적인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 융합서비스의 출현은 신규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 피할 수 없는 경로가 될 것이다. 이에 통신사업자들은 무선랜과 이동전화 서비스의 결합상품이나 위성 DMB와 이동전화와의 결합, 초고속인터넷과 VoIP의 결합 등 그동안 별개로 여겨졌던 서비스 간 결합을 통한 신규서비스 개발을 통해 돌파구를 찾으려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통신정책은 통신망 보급 위주의 성장시대를 거쳐 사업자간의 공정한 경쟁규칙 설정을 통해 통신시장에 유효경쟁체제를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 왔다. 그 결과 후발사업자의 매출액과 시장내 비중은 증가하고, 통신요금은 지속적으로 하락했으며, 통화품질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소비자 만족도도 지속적으로 상승하였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경쟁자에 대한 지원’이 아니라 통신시장의 파이를 키울 수 있는, 성장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정책일 것이다. 특히 통신시장의 무게 중심은 무선과 초고속인터넷으로 옮겨간 반면 규제는 과거의 유선 중심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아직 서비스별 ‘맞춤 규제’ 형식이 지속되고 있어 복잡한 규제 양상을 띠고 있다. 이는 통신시장의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규제 유연성을 감소시켜 오히려 규제비용의 상승으로 연결될 우려가 크다.
통신시장에 활력을 주기 위해서는 통신 인프라 위에서 구현되는 콘텐츠 부분에서 경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신규사업자가 기존 망을 임대하여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망투자에 따른 불확실성을 제거한 ‘무료 옵션’을 덤으로 구입한 것이다. 따라서 신규사업자는 정체된 시장에서 기존 망을 헐값에 임대해서 그 차액을 통해 이익을 남기려 하기보다는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서비스, 차별화된 상품을 개발해야 한다. 이것은 통신시장에 새롭게 참여하는 기업들의 생존전략이며, 전체 IT산업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제공하는 돌파구가 될 것이다.
또한 통신정책은 ‘기술중립성(technology neutral)’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수립되어야 한다. 통신산업의 특성상 사업자들은 보다 효율적인 대체기술이 도입되어 막대한 투자비를 회수하지 못할 불확실성에 직면하고 있다. 향후 통신정책은 이를 고려하여 기술 중립적인 최소한의 개입을 통해 사업자의 설비투자 위험을 최소화하고 투자유인을 저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 신규지역전화사업자(CLEC)의 파산과 통신 산업의 침체는 후발사업자에게 접속요소나 설비이용 대가를 정상가격에서 할인해 줌으로써 설비투자 없이 마케팅의 과당경쟁을 초래한 결과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술중립적 규제 측면에서 이동전화의 유선전화 대체에 따른 ‘유무선 규제균형’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특히 무선사업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접속료와 보편적 서비스를 통한 공익적 의무 부담이 유선사업자에 편중되어 있음은 시정되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공정한 경쟁 질서를 확립하여 시장기능을 정상화하는 것에 국한해야 할 것이다. 사업자의 영업활동, 특히 다양한 선택요금제나 결합서비스의 도입을 허용하는 규제완화가 필요하다. 또한 일부 한계기업의 퇴출은 유효경쟁 정책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 자연스러운 구조조정의 과정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전에도 이동사업자의 인수합병, 시티폰 사업 퇴출, 무선호출 사업자 통합 등 시장변화에 따른 지속적인 구조조정이 있어 왔다.
시장기능이 정상화된 이후에 보편적서비스의 고도화를 위한 통신망 투자를 유도함으로써 소비자의 선택의 폭을 확대시키고 인터넷 정보격차를 해소하는 정책이 자연스럽게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규제의 불확실성이 감소되어 통신 사업자가 신규, 융합 서비스 시장을 조성하기 위한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 이용경 KT 사장 ysnam@k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