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과학기술협력에서는 양국의 연구개발계획을 비교해 공통점을 찾는 경우가 많다. 국가가 보장한 계획을 통해 협력의 실효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남북한 과학기술협력에서는 작년 12월에 발표된 북한의 ‘새로운 과학기술발전 5개년계획(2003∼2007)’이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이 계획은 △인민경제의 기술적 개건 11개 과제 △인민생활 개선 6개 과제 △기초, 첨단기술 개발 5개 과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먼저 인민경제의 기술적 개건 분야에서는 화력, 수력, 풍력발전 확대와 송/변전체제 개편을 통한 손실 감소, 석탄 증산, 제철공장과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등 대형 공장에서의 전력소비 절감, 금속공업, 기계공업, 화학공업 등 전통산업의 생산성 향상과 수출품 품질개선 등에 주력하고 있다. 에너지 분야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인민생활 개선 분야에서는 알곡, 육류, 야채, 과일, 식용유, 어류 등의 생산량 증가와 산림녹화 등에, 기초·첨단기술 분야에서는 IT, BT, 신에너지, 신소재, 우주해양과학 등에 치중하고 있다. IT 분야의 주력 연구과제는 펜티엄Ⅳ 64대를 연결하는 병렬컴퓨터 개발, 각종 SW 개발과 수출, 위성자료 해석기법 개발 등이다.
특이한 것은 금년 상반기에 5개년 계획의 기술적 개건 부분과 상당히 유사한 ‘연료, 동력문제 해결을 위한 3개년계획(2003∼2005)’을 추가로 발표했다는 것이다. 최근 극심해진 연료와 동력 문제를 3년 안에 해결하고 그 이후에 첨단기술을 이용한 인민경제의 전면적인 기술 개건과 불균형 시정, 신규공업 창설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는 연구개발 예산이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국가경제의 사활이 걸린 에너지 분야에 과학기술계의 전체 역량을 투입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5개년계획, 특히 IT가 포함된 기초, 첨단과학 분야의 활성화 여부도 초기 3년간 집중되는 연료, 동력문제 해결 계획이 소기의 목표를 달성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여진다. 북한 과학기술계가 직면한 심각한 상황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그렇게 강조하고 있는 IT 분야가 과학기술계획에서는 22개 과제 중의 하나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시급한 에너지 문제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다. 연구비의 3분의 1 이상을 IT·BT 등의 첨단기술 분야에 집중하고 있는 우리의 국가연구개발계획과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이로써 동 분야의 정부간 협력에서 공통점을 찾아 프로그램화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기술계획에서의 어려움은 과학원 등 북한의 주력 연구개발기관의 어려움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7·1조치에서 강조한 것같이 연구소들도 국가 계획에 의한 재정 보조가 줄어드는 만큼 자체수익 창출에 몰두하게 된 것이다. 특히 SW 개발과 같은 응용 연구기관일수록 이런 경향이 심해진다. 최근 들어 IT 관련기관의 독립채산제 강화와 수익사업 확대, 번 수입에 의한 평가, 자율성 신장 등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도 이런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대외협력에서도 북한의 연구소들이 단기간의 수익 창출에 더 적극적이고 여타 분야는 배제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 따라서 남북 IT협력 당사자들도 북측 기관들의 현안문제 해결과 경제논리 전수, 이익 창출 등에 이전보다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이는 정부보다 민간 기업들이 더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영역이라 여겨진다.
정부는 좀 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전반적인 남북한 과학기술협력방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북한 과학기술정책과 주력 연구과제에 대한 기초연구 강화, 남북의 수요가 반영된 협력과제 선정과 특별 프로그램 설치, 남북경협과의 연계, 남북한 산업연계 강화, 해외동포와 국제기구와의 연계 강화, 관련 예산 확보 및 추진체제 정비, 국민적 합의 도출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cglee@step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