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시간이 임박한 평일 오후, 강남역 부근에 위치한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사무국에서는 모니터링 직원들 간에 작은 실랑이가 오갔다. “저는 더 이상 못합니다. 오후에 저 혼자 처리한 것만 1000건이 넘어요.”
일견 인터넷 불건전정보 신고의 폭주로 인한 사소한 불평처럼만 보였다. 안된 마음에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신고를 처리해야 하다니 모니터링 요원을 늘려달라고 해야겠다”고 했더니 담당자는 “이건 신고와는 상관없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때까지도 모니터링 직원의 말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사무국 관계자를 만나 얘기를 나누던중 그 자료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됐다. 사무국 직원이 경찰, 검찰, 국정원 등의 수사관과 수시로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이적성 표현물 등이 게재된 인터넷 사이트에 대해서는 아예 위원회에 심의자료로 올리지도 않고 바로 경찰청 등에 통보해 압수수색 등이 가능토록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가 국가기관의 기획수사를 위해 심의과정을 생략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도 위원회의 도움을 일부 받아오고 있음을 시인했다.
위원회의 법정기구적 성격과 임무 등을 고려할 때 국가안보, 시민안전 등과 심각히 결부된 사안에 대해서는 수사기관과 협조하는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온라인 자율규제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강조해 온 위원회가 심의와 경고 및 시정조치 등 행정상의 절차를 무시한 채 수사기관에 협조한다는 것은 뭔가 전도된 듯한 느낌이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심의규정 제17조는 ‘위원회는 심의관련 업무 이외의 목적으로 심의관련 자료를 외부에 공개하거나 유출해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심의관련 자료’에 심의하기 전의 자료는 포함시키지 않는 것인지, 경찰 등 수사기관은 ‘외부’가 아니라 한 집안 식구라는 뜻인지 알 수가 없다. 자율규제란 말로만 떠들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심의규정을 더 엄격히 적용하길 당부한다.
<정소영 정보사회부기자 s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