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를 전공한 영국의 여류 사학자 수잔 휫필드는 자신의 저작물인 ‘실크로드 이야기’에서 서기 700년대 톈진산맥 이쪽저쪽, 그러니까 아랍 쪽의 사마르칸트나 라사, 투르크, 인도, 중국인의 삶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황사의 발원지인 고비사막에 위치한 돈황을 발굴하다 찾아낸 각종 자료에 의해 드러난 옛사람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사람 사는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 티베트와 당나라, 위구르, 돌궐(투르크:지금의 터키), 거란의 세력 다툼과 초기 기독교, 조로아스터교(독일어로 짜라투스트라,배화교), 무슬림, 불교, 마니교 교도들 사이에 벌어졌던 미묘한 갈등의 역사가 가시선인장처럼 사막을 뚫고 머리를 내민 것은 1910년대였다.
영국탐사대가 휴지를 줍듯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수거해 간 뒤 일본도 꽤 짭짤한 수확을 거뒀다고 한다. 한·일 합방 무렵 일본의 정보망이 이곳에까지 뻗쳐 있었다는 사실은 전율마저 느끼게 해준다. 수잔 휫필드의 손짓에 모래 무덤 밖으로 불려나온 인물들은 隊商, 승려, 기생, 과부, 관리, 화가 등 10명에 이르는데 허구가 개입되어 있지 않아 색다른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지금도 요새처럼 험준하고 변덕스러운 기후 변화로 여행하는 데 상당한 애로를 겪는 실크로드는, 길이 아니라 길고 긴 무덤의 사행천(蛇行川)이었다. 야영하다가 몹쓸 병에 걸리면 누운 자리가 곧 무덤자리였기 때문이다. 야크나 낙타에 물건을 싣고 무리 지어 길을 나서다 모래 폭풍과 맞닥뜨리거나 도덕 떼를 만나 죽임을 당하는 일도 다반사라 실크로드를 타고 장삿길을 떠나는 건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모래무덤에 묻혀 있던 서간문과 무역물품 내역서 등을 참고 삼아 생생하게 재현한 실존 인물들의 이력에 숨겨진 역사코드를 읽다보면 어쩐지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를 둘러싼 제국들의 흥망성쇠, 허망함과 함께 세계사의 변방에서 조용한 아침만 기다리고 있던 한 나라의 모습이 떠올려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초강대국 당나라도 때때로 주위의 압박에 못 이겨 굴욕적인 외교를 할 수밖에 없었던 숨겨진 이야기가 담겨 있다. 지금은 중국의 자치구이지만 당시 티베트는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국가였다. 당나라가 고선지를 앞세워 초토화했지만, 티베트의 공세에 지친 당나라가 위구르에게 손 내민 적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당나라는 그 대가로 서기 821년 가을, 목종의 누이인 태화공주를 볼모로 내주며 위구르의 왕과 결혼을 시킨다. 낙타 50마리와 조랑말 1000마리를 예물로 받아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면서. 이 같은 정략결혼은 여러 차례가 있었는데, 심지어는 반란을 제압해준 답례로 황제가 한 도시를 약탈할 수 있도록 칙령을 내린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안록산과 황소의 난이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통일신라시대가 이 때쯤인 것 같다. 만약 신라왕이 실크로드에서 벌어지는 상황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그리하여 정치적으로 당나라와 뭔가를 놓고 액션을 취했더라면 우리의 역사나 영토의 크기가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 본다.
글로벌 경제니 세계화니 하는 요즘이다. 딱히 비유에 걸맞을지는 모르지만 정보화 시대 세계경영에 나선 우리 기업들의 새로운 전쟁터인 ‘디지털 실크로드’에도 변덕스러운 모래폭풍은 끊임없이 불어 올 것이다.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요즘, 우리 기업들이 모래폭풍처럼 변덕스럽게 급변하는 무역환경에 잘 적응하며 무사히 ‘사막’을 건너다니기를 바랄 뿐이다.
<서용범 논설위원 yb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