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디지털 방송정책과 합의과정

 지금 세계 방송계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 방송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옮겨가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화면과 음향의 질이 한결 좋아지고, 표준화질을 선택할 경우 많은 채널 확보가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데이터 방송과 같은 부가 서비스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송신자와 수신자의 양방향 커뮤니케이션과 전송방식에 따라서는 이동수신도 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에다 디지털 방송용 모니터나 셋톱박스와 같은 새로운 방송산업의 발전을 촉진해 신규고용과 이윤까지 창출한다.

 방송의 디지털 전환은 이렇게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 또는 일석사조의 효과가 있어 선진국들은 앞다투어 방송, 특히 무료 서비스인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영국을 선두로 미국, 일본, 독일 등 방송물 제작산업과 방송기기 제조업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지상파 방송의 디지털화에 더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전환정책은 불행히도 양자택일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고화질(HDTV)로 하되 소수 채널로 가느냐, 아니면 표준화질(SDTV)로 하되 다채널로 가느냐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술로는 표준화질을 택할 경우 아날로그 한 채널당 약 4개까지의 디지털 채널 확보가 가능하지만, 고화질을 택하면 아날로그 한 채널당 디지털 채널은 대체로 하나밖에 나오지 않는다.

 시청자, 특히 일반 서민 시청자에게는 표준화질의 다채널이 더 유리하다는 의견이 있다. 왜냐하면, 30인치 이하의 텔레비전 수상기의 경우 육안으로는 표준화질과 고화질의 차이를 크게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수상기가 적어도 50인치가 넘는 대형일 경우에나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는데, 일반 서민들이 구입하는 수상기는 대개 30인치 이하가 대부분일 것이다. 다시 말해 지상파가 표준화질을 택하게 되면 서민들에게 무료로 다채널을 서비스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돌아가는 이점이 있다.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50인치 이상의 대형 수상기의 경우, 그것도 고화질의 대형 수상기를 제조하는 기술력은 우리나라가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고화질의 대형 수상기는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대형의 고화질 수상기를 생산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가전업체들에겐 더 이롭다는 뜻이다. 따라서 우리가 디지털 텔레비전을 고화질로 하는 것이 전자산업 측면에서는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고화질의 대형 수상기를 국내시장에서 테스트할 수 있어 기술 개발에도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같은 점도 수출주도형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정책적으로 고려돼야 한다고 본다.

 영국이나 독일같은 유럽국가는 표준화질의 다채널을 선택했다. 이들 나라는 고화질은 유선방송이나 위성방송으로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미국, 일본, 호주 등은 고화질의 소수 채널을 채택했다. 여기서 어떤 선택이 더 좋은가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중대한 선택을 하려면 정책당국자, 방송사, 가전사 뿐만 아니라 방송비용을 궁극적으로 부담하는 시청자 대표들이 참여한 국민적 합의와 의견수렴 절차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싶다. 불행히도 상당수의 국민들은 우리가 고화질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런 절차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

 국가의 중요 정책이 국민적 합의와 의견수렴 절차의 부재나 부족으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못 받아 정책을 결정한 후에도 시비의 대상이 되어 혼란과 국력의 낭비를 초래하는 일이 빈번하다. 방송정책 당국자의 한사람으로서 중요정책 결정과정에서 국민적 합의와 의견수렴 절차의 중요성을 새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 이효성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hslee@kbc.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