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정채봉의 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全文>
이 글은 <오세암>이란 작품을 쓴 동화작가 고 정채봉님의 시입니다. 여리고 따뜻한 작가의 속살을 들여다 보면서 참 재미있구나 하고 속으로 웃었습니다. 마치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른이 된 후에도 엄마에게 이런 어리광쯤은 부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깜빡 잊었던 이 글이 왠지 요즘 들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닙니다. 처음엔 제가 요즘 심하게 앓고 있는 불황이라는 독감의 합병증으로 착각했습니다. 세상이 온통 거꾸로 돌아 현기증이 나서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한 거죠. 불면증에 시달리는 저는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친구들을 불러내 떳떳한 백수 자격으로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백수, 아니 요즘 말로‘이태백’이긴 녀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부터인지 술자리에 앉으면 우리는 힙합이나 랩보다는 나이에 안 어울리게
조용필의‘오륙도’를 목놓아 즐겨 부르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우리도 20년 후면 아버지처럼‘오륙도’로 가야할 것이니까 예행연습을 해놓자는 깜냥이지만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꾸 눈물이 나네요. 초·중·고·대학 거의 20년 가까이 한눈 안 팔고 열심히 공부만 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수학·과학 과목을 잘 해 전자나 첨단산업이 향후에 비전도 좋다는 말을 따라 남들이 알아주는 명문대학교 이공계로 진학했습니다. 헌데 갑자기 IMF날벼락이 치더군요. 불길한 조짐에 자원입대했죠. 인제·원통서 원통하게 시간 죽이다가 복학했지만 상황은 마찬가지더군요. 졸업 후엔 글로벌경제의 중심에 서겠다며 용돈을 쪼개 해외 어학연수도 다녀왔습니다. 완전무장을 끝낸 셈이죠. 헌데 이 무슨 뚱딴지입니까. 입사원서 내는 기업마다 투자할 상황이 안 돼 일자리가 없으니‘3D업종으로 가든지 넌 빠져 있어라’는 겁니다. 제 눈이 높습니까, 아니면…혹…제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 IMF를 초래한 백성인 게 첫 번째 잘못이고, 사회의 앞날을 제대로 예측해 잘못 선택한 게 두 번째 실수라니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과연 우리사회가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y) 같은 뛰어난 미래학자도 예측이 가능할 수 있는 그런 사회입니까. 아무래도 억지라도 실업자 신세 면하려면, 억울하지만 남들처럼 그래도 품위 지킬 수 있는 ‘백수들의 수용소’ 대학원에나 진학할까 합니다.
쉿! TV에서 실업대책 뉴스가 홍수처럼 흘러나옵니다. 올해 일자리를 550,000개 만들겠다는 희소식입니다. 누구는 총선용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래도 믿어야죠. 정부를 믿는 게 아니라 정책 입안자들 모두가 우리의 아버지나 형뻘이 되는 사람들이니까요.…하지만 만약 올해도 취직이 안 된다면 이 거추장스럽고 혐오스럽기만 한 내 젊은 시절의 억울함을 잊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30년쯤 지난 먼 훗날, 하늘나라에 가 계실지도 모를 우리 엄마에게 빠짐없이 일러바칠 겁니다. 엄마가 뭐라고 위로해줄지 모르겠지만, 또 이른다는 내 협박이 무서워 도망 칠 우리나라 벼슬아치들도 물론 아무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서용범 논설위원 yb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