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보다 한달 앞서 이동전화 번호이동성 제도를 시행한 미국에서 시장 1위 사업자인 버라이존이 가입자 유치경쟁에서 가장 큰 혜택을 입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내와 달리 선후발 사업자간의 시차제를 두지 않았고 단말기 보조금 제한이 없는 시장환경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무료단말기를 앞세웠던 2위 이하 사업자들이 오히려 가입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따라 번호이동 시차제가 끝나는 내년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지배적 사업자인 SK텔레콤의 시장독식 현상이 뚜렷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특히 후발사업자들 일각에서는 단말기 보조금 차등지원이나 시차제 연장, 요금규제 등 추가적인 비대칭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뚜렷해진 쏠림현상=가입자 1억5200만명에 달하는 미국 이동전화 시장에서는 우리보다 앞서 지난해 11월 24일부터 번호이동성 제도가 시행됐다. 한달 가량 6개 지역 사업자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 결과, 1위 사업자인 버라이존이 150만명을 신규 유치해 순증 가입자 86만여명으로 2∼4위 사업자를 큰 격차로 따돌렸다. 한달여간 전체 신규 가입자 320만여명 가운데 무려 46%를 독식한 셈이다. 이어 4위 사업자인 스프린트가 45만명 가까이 순증시킨 반면 2위 사업자인 싱귤러는 3만명이 순감했고, 특히 3위 사업자인 AT&T와이어리스는 60만명 가까이 감소했다. 버라이존이 1위 사업자이긴 하지만, 시장점유율 24%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서 가입자 쏠림현상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특히 한달여의 기간에 버라이존은 최신 기종 단말기에 대한 일부 할인혜택을 주는 데 그친 반면, 싱귤러·AT&T 와이어리스·스프린트 등 하위 사업자들이 하나같이 무료 단말기와 요금할인 등을 내걸었다는 점에서 이같은 결과는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환경차이인가=미국시장의 이같은 사례는 근본적으로는 시차제 없는 자유경쟁의 당연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더욱이 우리와 달리 미국 사업자들은 지역적 특성이 강한데다 사업자마다 서비스 차이 또한 상당부분 있는 게 사실이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염용섭 박사는 “보다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하지만 가입자 이동의 가장 큰 장벽인 번호와 단말기 구입비용 부담이 사라진 상황에서 1위 사업자의 쏠림현상은 자연스런 결과”라고 말했다. 특히 번호이동성을 앞둔 지난해 4분기 1∼3위 사업자의 마케팅 비용을 비교해 보면, 버라이존이 21억달러 넘게 지출해 2, 3위 사업자보다 무려 6억달러 이상 많이 쓴 성적이라는 점에서 국내 시장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1월 한달간 번호이동 시차제 시행결과 2위 사업자인 KTF가 순증 36만여명으로 시장경쟁의 기선을 잡았다. 하지만 가입자 유치에 발목이 묶인 SK텔레콤 또한 가입자 순감소분을 1만7000명선에서 막아내 선방했다는 평가다. SK텔레콤은 또 올해 마케팅 비용 1조8360억원을 책정, 통신사업자 가운데 가장 막강한 자금력을 과시하고 있다.
◇조심스런 시장전망과 비대칭규제 논란=증권가에서는 만일 시차제 없는 번호이동성 제도가 시행됐다면 1년 만에 SK텔레콤은 점유율을 2% 가량 더 늘렸을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동원증권 조성욱 애널리스트는 “현재 자금여력이나 마케팅 능력을 감안할 때 선발사업자인 SK텔레콤과 후발사업자의 격차는 미국보다도 크다”면서 “올해 SK텔레콤의 가입자 이탈보다는 내년이후 시장지배력 확대 정도가 더욱 강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따라 불과 한달여 지났지만 후발사업자들 사이에서는 번호이동 시차제 종료후 시장쏠림현상이 심화될 것이라며 보다 강도높은 비대칭규제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서서히 나오고 있다. KTF 남중수 사장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대로 가다간 후발사업자들 모두 공멸하고, 결국 SK텔레콤의 독점력 강화와 소비자 피해로 돌아갈 것”이라며 시차제와 더불어 요금·기변보상 등 추가적인 규제조치를 요구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번호이동성 제도의 근본적인 목적이 소비자 편익에 있는데다, 더 이상의 비대칭규제가 또 다른 부작용을 불러올 수 있다며 부정적인 시각이다. KISDI 염 박사는 “번호이동성 제도는 소비자를 위한 정책이며, 전세계적인 흐름이므로 이를 되돌릴 수는 없다”면서 “더욱이 경쟁활성화라는 보조적 목적을 위해 시차제를 둔 만큼 정책적 판단에도 혼선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
미국, 1위업체 쏠림현상 오히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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