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리눅스가 처음 선보인 93년이다. 11년여가 지난 지금 국내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리눅스 열풍이 불고 있다. 여전히 컴퓨터 운영체제에서 윈도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리눅스가 공개 소프트웨어로 가능성과 역할을 인정받고 있다.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 유럽 각국은 리눅스를 전략적인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초기 리눅스가 세상에 공개된 뒤 지금 처럼 전세계적인 관심사가 될 줄은 어쩌면 리눅스를 만든 리누스 토발즈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에 리눅스를 불러들인 리눅스 1세대의 대표선수는 누구일까. 리눅스 업계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리눅스코리아의 이만용 이사를 꼽는다. 리눅스에 있어서만큼은 그가 독보적이라는 설명이다. 그렇다고, 그를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 위엄 있는 중년의 임원 정도로 상상하면 착각이다. 그는 아직도 좌충우돌하며 다니는 전형적인 젊은 프로그래머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2002년 토발즈가 한국을 방문해 세간의 관심을 모았을 때 토발즈가 바로 이 이사의 집에 함께 머물렀다는 것은 이 분야의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회자되는 화젯거리다.
“리눅스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롭다는 것입니다. 또 전 세계가 이미 이를 향해 가고 있으며, 우리도 서둘러야 한다는 대목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 이사가 리눅스를 처음 접한 것은 96년. 당시 대학생였던 그는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빌게이츠를 꿈꾸며 윈도 개발툴을 사용해 선거 관련 프로그램 만들어주며 용돈 벌이를 하고 있었다. 학교 전산실에 눌러앉아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던 그는 후배가 던져 준 ‘슬랙웨어’라는 초창기 리눅스 배포판을 보게 됐다. 그러나 이 만남은 우연으로 끝났고 프로그램 제작을 통해 용돈을 모아 떠났던 유럽 여행에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리눅스를 만났다.
“여행 도중 독일의 어느 역 가판대에서 리눅스 CD를 팔고 있더군요. 혹시나 해서 하나 사왔고 제 PC에 설치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인 리눅스 인생이 시작됐습니다.”
독일에서 가져온 CD는 독일어하고 영어판이었다. 이를 한글화해 한글 배포판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알짜 리눅스’라고 하는 대여섯 명의 멤버들을 모아 공동작업에 착수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국내 최초의 한글판 리눅스 ‘알짜 슬랙웨어 3.1’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 멤버들과 합숙하며 배포판을 만들던 당시 마지막 CD를 굽던 날 코피가 확 터졌습니다. 작업기간 중 잠을 거의 못 잤기 때문인데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작업도 그에게는 취미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가 리눅스 비즈니스에 뛰어들게 만든 것은 98년 그가 미국에서 직접 본 레드헷 본사의 광경이었다.
“책 쓰고 프로그램 판 돈 가지고 미국 레드헷이 있는 자리에 가서 사람들을 봤습니다. 동호회 수준이 아니라 리눅스를 사업화한 모습을 본 것이죠. ‘아 이렇게 빠르게 움직이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98년 그는 한동훈, 김성우씨와 함께 창업을 서둘렀다. 99년에는 법인으로 전환했다. 2000년 들어서는 현 박혁진 사장이 가세했다.
리눅스코리아는 여타 다른 벤처기업과 마찬가지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동안 하드웨어와 교육분야에 발을 들였다가 실패하는 등 시행착오를 겪은 리눅스코리아는 리눅스용 솔루션 개발을 비즈니스 모델로 선택했고 이 분야에 주력하고 있다.
“리눅스를 쓸려면 사용가치가 있어야 하는데 OS가 튼튼하다고 해도 그 위에서 쓸 것이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튼튼한 OS위에 실제로 사용될 수 있는 것, 돈 되는 업무에 리눅스가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춰 ISP나 통신사 쪽에 들어가 서비스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이사가 현재 회사에서 하는 일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개발실에서 개발인력과 같은 차림으로 같은 작업대에 앉아 밤새며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다만 이사라는 직함 때문에 가끔 기술영업을 나서는 것만이 다른 개발자들과 다르다.
“해외를 돌아다니다 보면 40∼50대 엔지니어들을 많이 볼 수 있지만 국내에서는 개발자도 나이가 들면 관리로 돌아서는 풍토가 안타깝습니다.”
개발업무와 함께 그는 자신보다 더 유능한 개발자를 발굴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지금 제 곁에는 천재 같은 프로그램머가 몇 명 있습니다. 이 같은 개발자들이 20∼30명 정도 모인 개발팀을 갖고 싶습니다. 이들과 함께 세계 리눅스 시장을 말 그대로 석권하는 것이 꿈입니다.”
최근에는 ‘파이썬’이라는 개발언어에 푹 빠져 있다. 새로운 것을 찾는 그에게 파이썬은 구조가 정교해 비주얼베이직과 같은 프로그램과는 등급이 다르다는 설명이다.
“윈도와 리눅스를 오가며 특히 네트워크에서 제어하는 것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당연히 공짜이고요. 프로그램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권해주고 싶은 보석 같은 언어입니다.”
남들은 그를 국내 리눅스의 대표선수지만 이 이사는 자신을 항상 프로그래머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재미있는 일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중에서 다른 것 못지 않게 재미있는 것이 프로그래밍입니다. 현실 세계보다 훨씬 정직한 세계라는 사실에 매료됩니다.” 원로 소리를 들으면서 지금도 개발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다.
*약력
◇1990년 서울대학교 지질과학과 입학 ◇1996년 나우누리 리눅스 동호회 시샵 ◇1996년 9월국내 최초 한글 배포판 알짜 슬랙웨어 3.1발표 ◇1997년 1월 알짜 레드햇 4.0발표 ◇1998년 10월 한국 리눅스 비즈니스 설립 ◇1998년 12월 최초 판매용 공식 버전 알짜 레드햇 5.2 발매 ◇2000년∼현재 1월 리눅스코리아 개발이사
<윤대원기자 yun1972@etnews.co.kr>
■내가 본 이만용 이사:미지리서치 서영진 사장
98년 창업할 때부터 지금까지 이 이사를 옆에서 늘 지켜봤습니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리눅스라는 단어가 익숙하지 않던 시절에 스스로 이 분야에 뛰어 들었고 그 이후 이후로 지금까지 한길을 걸어 온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떤 때는 이 이사가 행운아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는 적절한 시기에 리눅스를 만났고 리눅스를 개발하기 좋은 환경에 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리눅스에 대한 각별한 사랑만큼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서울대 지질학과를 6년이나 다녔지만 컴퓨터 분야로 ‘외도’를 해서 아직 졸업장은 받지 못했습니다. 리눅스를 공부하기 위해 혼자 배낭을 메고 유럽 등지를 돌아다닐 정도로 리눅스에 푹 빠진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졸업장이 있는 사회에서 중퇴의 의미가 무얼까 생각도 해 보지만 이 이사에게는‘서울대 졸업’이라는 학력보다 오히려 ‘중퇴’라는 타이틀이 멋있게 보입니다.
또 하나 특징적인 것은 이 이사가 팀을 조직하고 사람들을 끌고 가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리눅스 코리아에 입사원서를 내러 오는 젊은 프로그래머들이 많은데 그들의 입사 동기가 다름 아닌 이만용 이사와 함께 근무하고 싶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젊은 프로그래머 사이에서는 말 그대로 ‘전설’ 같은 사람입니다. 사실 이 이사는 바쁜 와중에도 PC통신 리눅스 동호회를 이끌고 ‘한글 알짜 레드헷’을 비롯한 리눅스 전문서적 5권을 펴냈습니다. 이 가운데 ‘한글 알짜 레드헷’은 베스트셀러에 오르면서 리눅스 엔지니어들 사이에 교과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그를 찾아오는 프로그래머가 많은 것도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이 이사가 자신의 인기를 리눅스 인재들을 리눅스를 활성화하는 쪽으로 이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리눅스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게 ‘전문인력 양성’이라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대목입니다. 바꿔 말해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의 현실이 ‘사용자는 많은데 개발자는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이사가 리눅스 인터내셔널의 존 홀 회장 등 해외 리눅스 전문가들과도 친분을 유지하면서 세계 리눅스 전문가네트워크 구성을 추진중이라는 소식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