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무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직원과의 만남을 즐기는 사람. 다소 불편해 보이는 다리. 그리 훤칠하지 않은 키.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감을 갖게 하는 사람 좋은 인상의 소유자.
삼성전자 프린팅사업부를 책임지고 있는 김영철 전무(51세)다.
김 전무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국내 레이저프린터 사업을 HP, 캐논 등 세계적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힌다.
그는 지난 91년 45명의 개발연구 인력으로 프린터사업부 팀장을 꾸린 이래 10여 년 만에 800여명의 엔지니어들과 세계 일류 레이저프린터 개발을 위해 오늘도 도전의 길에 오르고 있다.
그는 지난 2000년 2% 미만이던 삼성전자 레이저프린터 시장점유율을 지난 2002년 9.6%, 2003년 15%로 끌어올리면서 세계 2위 자리에 올려 놨다.
초기에는 선진기업과의 기술격차 및 특허 장벽에 막혀 어려움을 격었고, 90년대 중반 1차 독자 브랜드 수출을 시도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이후 제조업 평균 R&D비율의 2배인 8%의 R&D를 투자해 제품 기술을 끌어올렸다.
특히 올해부터는 지난 7년간 개발을 추진해온 컬러 레이저프린터를 국내 독자 기술로 출시, 세계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그 중심에 삼성전자 디지털프린팅 사업부 김영철 전무가 서 있다
그는 지난 20여년 노력의 결과로 김영철 전무는 통신연구소 출신 중 최초로 삼성전자 임원으로 승진한 것은 물론 각종 과학기술 분야에서 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오늘날 김 전무가 이룬 삼성전자 레이저프린터 사업의 성과의 이면에는 남모르는 고뇌와 눈물이 있었다.
“용기는 극도의 절망감에서 나온다. 다소의 위기의식은 생활에 새로운 자극을 준다.” ,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도전하는 삶이 필요하다.”라는 말은 그의 직업관과 인생관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김 전무는 지난 77년 성대 물리학과(학사), 전자공학과(박사)를 졸업하고 삼성전자 연구소에 입사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마이콤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갖춘 그에게 맡겨진 첫 번째 임무는 팩시밀리 개발이었다. 신입사원 시절, 그의 마음속에는 ’만약 내가 박사학위 소지자가 아니었다면 삼성전자는 나를 뽑지 않았을 것”이라는 일종의 부담을 안고 있었다. 80년대 초반에만 하더라도 박사 학위 소지자가 삼성전자에 입사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특히 선천적으로 장애를 갖고 있는 그는 장애를 뛰어넘어 능력으로 승부해야겠다는 자기만의 결심을 당시 세웠다.
지난 94년 삼성전자가 대대적으로 추진했던 ‘1사1품 과제’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었다. 총 40억원의 예산이 배정된 1사1품 프로젝터는 동료직원들조차 ‘성공확률 20%, 리스크 80%’라고 생각했을 정도로새로운 도전이자 도박이었다.
그는 고심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1사1품 과제는 그의 능력을 대외적으로 인정받게 한 계기로 작용했다.
“되는 것을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을 보완하게 되는 지혜가 생기더라.”는 그의 말은 당시의 절박했던 상황을 연상시킨다.
김 전무는 지난 94년 일반용지 팩시밀리 개발에 성공하면서 프린터 사업의 기반을 확보했다. ‘성공히스토리’를 갖춘 인물을 요소요소에 배치하는 삼성전자의 인재관리 특성에 따라 그는 핵심프로젝트를 잇따라 맡게 된다.
그는 이후 신개념 셔틀 스캔방식을 장착한 잉크젯 복합 프린터, 평판 레이저 방식의 디지털복사기를 개발한 데 이어 무선네트워크 프린터 카드를 개발해 디지털 컨버전스의 발판을 마련했다.
“어려운 것은 있으나, 실패를 해 본 적은 없다”는 삼성전자 생활은 업무를 대하는 태도는 물론 그의 인생관을 느끼게 한다.
선천적인 다리 장애라는 핸디캡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그는 남들보다 2∼3배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 같은 노력은 장영실상 7회 수상, 엑설런트 코리언테크놀로지상 2번 수상으로 이어졌다.
지난 2001년에는 대한민국 신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지난해 과학의날 에는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이 같은 화려함 뒤에는 남들이 모르는 사연도 많다. 김 전무는 과거 구미 연구소에 근무할 당시 1년간 호주머니에 사표를 지니고 다닌 적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할 때 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자문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전직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신적인 방황은 잠시. 김 전무는 어두운 시절의 돌파구를 당시 동고동락하면서 제품 개발을 같이 했던 후배들에게서 찾았다. 카이스트 출신 후배들을 떠나는 것이 무책임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김 전무는 “프린터 사업은 기술 융합을 필요로 하는 ‘시스템 테크놀로지의 결정체’ 며 특히 레이저프린터의 경우 광학, 물리, 화학 및 소프트웨어가 결합한 제품”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인지 삼성전자 프린팅 사업부는 ‘역할&책임(Role &Responsbility)’ 원칙하에 개개인의 능력에 의존하기 보다는 ‘팀웍’ 에 따라 움직인다. 소프트웨어, 미들웨어의 표준화를 통해 제품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작업도 병행되고 있다.
김 전무는 프린팅사업부를 맡은 직후 러시아, 인도, 미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프린팅 개발연구소에 24시간 가동시스템을 도입했다. 특히 다국적 기업과의 승부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글로벌 스탠더드로의 체질 개선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프린팅 소프트웨어 개발자를 한국계 미국인으로 채용한 것은 물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의 회의에 영어를 도입했다. 3년 전부터는 신입사원들도 영어 문서를 통해 프린팅 개발업무를 하게 하는 프로세스를 도입,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홀로 연구개발하는 장인정신이 중요시 됐던 시기도 있었다”며 “하지만 21세기는 시스템적으로 협력하는 협업이 요구된다”며 지론을 내세운다.
지난해 11월 김영철 전무는 고위경영진으로부터 프린터를 차세대 일류화 품목으로 육성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오는 2007년에는 삼성 레이저프린터를 전세계 시장에서 ‘톱1’에 올리겠다는 것이다.
프린팅 시장규모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 400억달러의 2배 이상인 1000억달러에 달하고 차세대 산업으로 꼽히고 있다.
김 전무는 “최소한 소프트웨어 및 기구 부문에서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HP, 캐논과 함께 레이저프린터 시장에서 3강 체제를 구축하겠다”고 목표를 밝혔다. <김원석기자 stone201@etnews.co.kr>
◆약력
△1952년 9월 8일생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77년 2월)
△성균관대학교 전자공학과 졸업(87년 8월)
△삼성전자 입사 (82년 7월)
△삼성전자 프린팅 개발팀장(96년 1월)
△삼성전자 프린팅 개발팀장(전무) (2004년 1월)
주요수상 경력
△장영실상(과학기술부 장관상) 7회 수상
=팩스용 퍼지 화상처리 IC
=비대칭 비구면 플라스틱 렌즈 1매를 이용한 광학계 등
△KT(엑설런트 코리언 테크놀로지)상 2회 수상
=히트 파이프를 이용한 순간정착 방식
=양면인쇄 디지털 복사기
△대한민국 신지식인으로 선정
△2003년 과학의 날 대통령 표창 수상(2003년 4월)
*내가 본 김영철 전무 - 프린팅 개발실 김정래 수석
김영철 전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내가 신입 사원으로 입사후 1년뒤인 김영철 대리 시절이다. 지금은 임원으로서 전체 기술 개발의 방향과 솔루션을 제시하며 월드와이드 No.1 프린터 회사를 만들기 위해 기술 첨병을 진두 지휘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언행의 배경에는 예전 엔지니어로서의 기본 자세가 직급과 직책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남아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엔지니어의 기본 덕목인 순수함이다. 일례로 신입 사원 시절 한 프로젝트에서 나는 소프트웨어 개발, 김영철 당시 대리는 하드웨어 개발 팀장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 처음으로 자체 개발해 팩스에 장착한 D램(RAM) 콘트롤러에서 데이터가 깨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임베디드 제품의 특성상 하드웨어 문제인지, 소프트웨어 문제인지 분석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서로 자신의 영역의 문제가 아님을 분석, 검증하고 데이터를 제시해가며 둘 다 엔지니어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2개월여를 밤새가며 싸운 끝에 결론을 내지 못했다. 소프트웨어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는 일방적인 매도에 가까운 결정과 함께 흐지부지 종료됐다.
그 후 1년뒤 어느 날 갑자기 김영철 대리가 날 찾아와서는 "미안하다. 네가 맞았다. 그 문제는 하드웨어 설계 미스였더라"고 말했다.
다른 프로젝트를 수행하다 같은 문제가 발생했고 문제를 더 분석해 본 후 하드웨어 마진이 부족해 발생했던 문제였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 그 회로를 개발한 담당자나 어느 다른 하드웨어 설계자도 아무 얘기가 없었는데 이제는 서로 다른 프로젝트를 수행하느라 헤어진 사람에게 1년이 지난 후 찾아와서 기술자로서 사과한다고 하는 그에게 처음으로 진정한 엔지니어의 순수함에 대한 매력을 느끼게 됐다.
그 후 지금까지 수많은 장영실상 수상, 일사일품 과제등을 수행하면서 기술자는 꼭 선구자이어야만 한다며 자신과 휘하 개발자들이 쉬운 길보다는 항상 어려운 길을 걷도록 이끌어 왔지만 그 밑바탕에는 당신의 욕심에 가까운 열정과 더불어 전혀 상반되는 그 순수함이 밑바탕이 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이 이를 인정하고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2004년은 월드와이드 No.1 회사를 만들기 위한 또 한 번의 중대한 도약을 요구하는 시기이고 김영철 전무는 그 중 가장 기초 요건인 프린팅 기술에 있어서 톱1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제는 요원하게만 느껴졌던 No.1 경쟁사를 따라잡을 수도 있겠다는 그런 느낌을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받고 있으며 김영철 전무의 그러한 집념은 절대 꺾이지 않을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