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통신산업에 두번째 격변기가 다가오고 있다.”
지난 84년은 미국 통신업계에 커다란 변화의 시기였다.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엄 벨이 설립한 통신업계의 제왕 AT&T가 정부와의 반독점 소송에서 패하면서 몇 개의 지역 전화회사로 강제로 분리된 것. AT&T는 이후 주요 사업부문을 잇따라 매각하고 미국통신시장을 주도하는 위치에서 밀려나더니 결국 평범한 지역 전화회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20년이 지난 현재 미국의 통신업계는 또 한번의 격변을 맞이하고 있다. 저렴한 비용으로 통신시장 틈새상품으로 간주되던 인터넷전화(VoIP)서비스가 기존 통신서비스를 제치고 주류에 진입하면서 기존 통신산업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내 인터넷 전화사용자는 이미 300만명을 돌파하고 전체 통화량의 10% 이상을 차지했다. 특히 기업들은 비용절감 차원에서 훨씬 적극적으로 VoIP환경을 받아들이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인스태트/MDR은 이런 추세로 VoIP시장이 급신장할 경우 2007년까지 미국내 VoIP가입자수는 140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미 VoIP시장은 보니지와 DSLi, 보이스펄스 등 중소업체들과 유선전화 사업자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실정이다. 특히 버라이존과 벨사우스, SBC 등 기존 지역전화 사업자들은 자신들의 사업기반을 침해하는 VoIP확산에 적대감을 표시하면서도 올들어 VoIP시장에 앞다퉈 진출하는 상반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어차피 유선통신시장에서 VoIP의 부상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는 사실을 지역 전화사업자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반면 AT&T와 스프린트 같은 장거리 통신회사들은 저렴한 VoIP서비스가 확산될 경우 지역 통신시장에 손쉽게 진출할 기회가 생길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런 변화의 조짐 속에서 미국 통신업계는 요즘 인터넷전화를 어떤 법적인 틀에 넣을 것이냐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가장 큰 법률적 이슈는 인터넷 전화인 VoIP가 과연 기존 전화와 같은 통신서비스냐 아니면 데이터 서비스에 해당되는 지의 여부다.
그동안 VoIP는 데이터서비스로 간주됐기 때문에 통신관련 세금이나 법률적 규제가 적용되지 않았다. 지난 2월 미 연방통신위원회(FCC)는 인터넷 전화에 대해 기존 전화와 똑같은 세금과 규정을 적용할 경우 인터넷이라는 신기술 성장을 저해할 수 있다며 VoIP업계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통신업계의 반발을 의식한 마이클 파월 의장은 최근 VoIP서비스에 어떤 형태로든 규제가 필요하다며 다시 말을 바꾸는 등 갈팡질팡하고 있다.
VoIP시장의 확산은 기존 통신장비업계에도 거센 도전으로 다가오고 있다. 미국 통신 및 케이블 업체들이 VoIP전화사업에 속속 뛰어들면서 그동안 구축해온 유선전화 네트워크의 상당부분을 IP(Internet Protocol)기반으로 바꾸고 있기 때문. 현재 루슨트와 알카텔, 노텔 등 대형 통신장비업체들은 시장변화에 대응해 소프트기반의 IP스위치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이 분야에선 소누스, 보칼텍 등 VoIP장비 전문업체들의 입지가 탄탄해 예전 같은 시장독주를 기대하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향후 음성통신의 근간은 VoIP가 맡게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미국의 통신산업이 VoIP란 빅뱅을 거치고 난 뒤 승자와 패자가 어떻게 갈릴지 아직은 불확실하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