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시기를 ‘보릿고개’라고 한다. 먹을 것이 풍부한 요즘에야 먼 기억이겠지만 50∼60대라면 굶주린 그 때를 잊지 못할 것이다. 5∼6월 농가의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워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이 고비를 잘 넘겨야 1년을 또 버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이 시기에 영양실조나 많은 질병에 걸린다. 연례행사처럼 찾아들던 농촌의 빈곤상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보릿고개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지금은 먹을 것이 너무 풍부해 비만을 염려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잘 살아보자’고 목소리를 높였던 과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보릿고개를 옛말로 만든 주역을 따지자면 ‘새마을 운동’과 ‘공업화’가 단연 1등공신이다. 선남선녀들이 ‘공돌이’ ‘공순이’라는 비아냥을 이겨내며 일군 텃밭이 오늘의 경제를 있게 했다. 또 그들을 고용했던 중소기업들이 오늘날 한국경제의 주춧돌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최근 중소기업협동중앙회가 중소기업경영인 200여명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었다. 참석한 중소기업 경영인에게 한 연사가 이색질문을 던졌다. “여기 계신 분 가운데 죽고 싶으신 분 손들어 보세요?” 결과는 의외였다. 참석인원의 85%가 손을 들었다. 신문, 방송에서나 간혹 나오던 중소기업 사장 자살이 실제로는 중소기업 경영인 누구나 생각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목숨을 내건 사투를 한다고 중소기업 경영인을 표현한다. 그 사투에서 이미 많은 중소기업 경영자는 전의를 잃었다.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자금조달이다. 경기가 경색되면서 매출이 줄고 자금줄에 문제가 발생한다. IT기업의 구휼미 역할을 했던 프라이머리CBO의 만기가 도래했다. 많은 기업들이 파산해 원금회수조차 힘들다. 은행권의 대출도 어렵다. 이익을 못 내다보니 구매자금 대출은 ‘하늘의 별따기’다. 지급준비율 확보를 위해 원금회수마저 들어간다는 소문이 나돈다. 투자는 더욱 기대하기 힘들다. 옛말이 된 ‘보릿고개’가 기업들에겐 아직도 남아 있다. 5월 보릿고개가 농촌에서 기업으로 옮겨왔다. 국가경제의 뿌리가 되는 중소기업을 ‘아사’에서 구제하는 것이 가장 먼저인 것 같다.
이경우 디지털문화부 차장 kwle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