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문화가 척박한 이 땅에서 로봇기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요즘처럼 뜨거운 적은 일찌기 없었다. 언론매체에선 로봇을 우리 경제를 먹여살릴 차세대 성장엔진이라며 연일 치켜 세우고 상업적으로 당장 도움이 안될 듯한 로봇개발프로젝트에도 과감히 정부예산이 배정된다.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청소로봇들이 실제로 백화점에서 팔리고 아이들 공부를 도와준다는 교육용 로봇도 국내서 양산단계에 들어갔다.
이제 대중들의 상상력은 머지않아 로봇하인이 온갖 궂은 일을 대신해주는, 영화 ‘바이센테니얼맨’에 나오는 앤드루 같은 인간형 로봇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즐거운 공상도 유비쿼터스 세상에서는 대폭 수정이 불가피하다. 인간을 닮은 존재를 만들려는 염원에서 비롯된 로봇의 진화는 최근 유비쿼터스 컴퓨팅이란 거대한 기술흐름 속에서 유비봇(Ubi-bot:유비쿼터스 로봇)이란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유비쿼터스 기술환경 속에서 로봇이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를 고려하지 않고는 미래의 로봇세상을 제대로 예견할 수 없는 시기가 도래했다. 그렇다면 공상과학영화에 흔히 나오는 인간형 로봇과 유비쿼터스 세상에서 만나게 될 ‘유비봇’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대전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선 지난 13일 우리나라 로봇개발에 한 획을 그을 만한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KAIST에 지능로봇연구센터가 새로 들어서는 개소식을 맞아 이 곳의 지능로봇연구실에서 유비쿼터스 개념과 로봇기술을 접목시킨 유비봇을 선보인 것이다.
‘리티(Rity: Robot intelligence Technology)’라고 불리는 이 유비봇은 외형상 귀여운 강아지를 본 떠 만들었지만 소니의 로봇강아지 ‘아이보’처럼 전기모터로 움직이는 진짜 로봇은 아니다. 리티는 현실세계가 아니라 PC화면 속에서만 돌아다니는 일종의 3D 가상생명체이다. 아무리 좋게 봐도 한물간 90년대 오락게임에나 등장할 법한 강아지 캐릭터를 왜 로봇이란 카테고리에 집어넣었는지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 대학의 전자전산학과 김종환 교수는 자신이 개발한 리티가 첨단로봇의 일종이며, 그것도 유비쿼터스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유비봇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리티는 비록 컴퓨터 안에만 존재하지만 PC와 연결된 각종 센서를 통해 외부의 빛과 소리, 접촉, 시각, 균형감. 시간흐름 등 47가지의 자극정보를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73가지 각기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광센서가 PC와 연결돼 있을 경우, 한 밤 중에 연구실의 갑자기 조명을 켜거나 큰 소리를 내면 PC 화면 속에서 자고 있던 강아지가 벌떡 일어나는 식이다. 또 최소한 외견상으로는 진짜 강아지처럼 외부의 상황변화에 따라 호기심이나 친밀감, 지루함을 느끼고 이에 기쁨, 슬픔, 분노, 공포, 평상심 등의 5가지 감성표현을 할 수 있다.
“그동안 세상에 등장한 로봇은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기계부품으로 움직이는 실체를 지닌 로봇과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 게임상에서 존재하는 가상의 로봇입니다. 하지만 리티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경계를 넘나들며 상호작용을 하는 최초의 로봇입니다.”
김교수는 리티가 소프트웨어로 구성됐기 때문에 네트워크 기능과 고유 IP를 부여하면 언제·어디서나 접속해 사용자의 위치로 불러올 수 있는 유비쿼터스 로봇(유비봇)이라고 설명한다. 또 사용자가 강아지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에 따라 리티는 서로 다른 고유한 성격으로 자라나게 된다.
리티는 또 PC에 설치된 얼굴인식 프로그램과 전용 카메라를 통해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고 주인일 경우 친근한 애정표현을 하도록 프로그램됐다. 카메라 앞으로 주인이 다가서면 반갑게 꼬리를 치며 화면 앞으로 다가오고 다른 사람이 얼쩡거리면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식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온라인 캐릭터를 로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김교수는 “유비봇은 그 자체로 무형의 소프트웨어(지능)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외부 센서와 연결돼 상황판단을 하는 컴퓨터(두뇌)와 실제 청소나 경비활동을 하는 작업용 로봇(손, 발)과 연계할 경우 완벽한 로봇으로 기능합니다.”라고 답한다.
우리는 그동안 로봇을 영화 속의 인간형 로봇(바이센테니얼 맨)처럼 혼자 주변상황을 판단하고 기동성을 가져야 하며 당연히 복잡한 기계부품으로 꽉 들어찬 최첨단 제품으로만 상상해왔다. 그러나 로봇에게 필수적인 인공지능과 감각기능을 주인이 들고 다니는 휴대폰이나 주변 환경에 분산시킬 수 있다면 굳이 값비싸고 덩치 큰 로봇가정부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다. 소프트웨어 기반의 유비봇은 언제 어디서나 주인의 명령을 받들어 작업용 단말기(work terminal:청소로봇, 경비로봇 등)를 통해 업무를 처리하고 일이 끝나면 온라인 세상 너머로 사라진다.
아직 유비봇으로서 리티의 기능은 초기단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인공지능 강아지가 좀더 발전할 경우 유무선 네트워크를 자유로이 옮겨다니면서 주변의 작업용 로봇(청소, 경비로봇)을 작동시켜 주인이 원하는 일을 언제 어디서나 수행할 것이라고 KAIST 연구진은 예상한다. 또 미국·일본 등 선진국들이 앞다퉈 개발하는 PC기반의 가상 로봇과 비교해도 스스로 외부상황을 인식해 행동하는 리티의 컨셉이 더 앞섰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리티는 새로운 개념의 유비봇을 현실세계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에 우리나라 로봇발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고 김교수는 자부한다.
즉 모든 사물과 공간에 컴퓨팅 기능이 들어가는 유비쿼터스 세상에서는 로봇도 지능화한 주변 환경을 적극 활용해 공간을 초월한 작업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유비봇의 핵심 컨셉이다.
이제 설거지로봇, 청소로봇, 경비로봇만을 로봇이라고 간주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기계덩어리들은 유비쿼터스 로봇시스템을 움직이는 하나의 구성요소일 뿐이다. 일상의 사물에도 지능과 네트워크 기능을 부여하는 유비쿼터스 환경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능형 소프트웨어도 로봇시스템의 일부로 간주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일부에서는 지능형 캐릭터에 불과한 ‘리티’를 유비쿼터스 로봇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다소 과장됐다는 평가도 있다. 사실 리티에 적용된 3D그래픽은 대학원생들이 밤새워 만든 티가 역력하고 얼굴인식기술이나 다른 기능도 그 자체로 보면 전혀 색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지능형 캐릭터를 로봇이란 컨셉으로 바라보는 시각, 유비쿼터스 세상에선 로봇도 언제 어디서나 주인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컨셉은 분명 선진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유비쿼터스 혁명과 로봇기술의 만남은 이미 시작됐다. 로봇은 이제 주인이 부르면 언제·어디서나 달려와 도와주는 유비쿼터스적인 존재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알라딘이 낡은 램프를 문지르면 튀어나오는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말이다.
[인터뷰]김종환 KAIST 로봇지능제어연구센터장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지능제어연구센터장인 김종환 교수(47)는 지난 95년 로봇을 이용한 축구경기를 최초로 고안하고 97년 세계로봇축구연맹(FIRA)을 창설, 로봇 축구의 아버지로 불린다. 김교수는 최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경계를 허무는 유비봇 모델을 선보여 관심을 끌고 있있다.
―유비쿼터스 로봇을 개발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실생활과 가상세계의 경계가 없는(SEAMless) 소프트기반의 지능형 로봇을 몇년 전부터 구상해왔다. 로봇 강아지 리티는 언제 어디서나 불러올 수 있고 실세계와 상호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내가 꿈꾸던 컨셉을 일부 구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기존에 나온 지능형 소프트웨어와 유비봇은 무엇이 다른가.
▲ 컴퓨터 환경에서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지능형 프로그램은 지금도 존재한다. 하지만 어디까지 컴퓨터 안에서 영향을 미칠 뿐이다. 유비봇은 실세계의 외부자극에 반응하고 물리적 힘을 외부에 투사할 수 있기 때문에 소프트웨어의 한계를 넘어 로봇이란 컨셉에 더 가까이 다가간 존재다.
―유비봇이 언제쯤 상용화될 것으로 보는가.
▲앞으로 3∼5년 후면 IT기반의 유비봇이 웹패드나 PC, 자동차에 응용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한국이 경쟁력을 지닌 차세대 로봇은 IT기반 유비쿼터스 로봇분야가 더 유망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정부의 로봇프로젝트가 하드웨어 위주로 진행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유비봇에 대한 정부와 민간기업체의 과감한 지원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