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약속`을 지키자

 얼마 전 대학 동창 모임에 나간 적이 있었다. 푸념을 섞어가며 경제와 사회가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몇몇 친구가 있어 자연히 말꼬리가 그쪽으로 몰렸다. 모두들 고등학생 하나, 둘 있는 학부모인지라 어느새 술자리가 교육제도개선의 세미나 장으로 변했다. 술자리 끝물에 지천명(地天命)의 나이임에도 교감자리는 언감생심인 듯 ‘평교사 고수’가 좌우명인 것처럼 보이는 친구 K가 자괴감 어린 표정으로 내뱉은 말 한마디는 어처구니없었다. 글쎄 자기 담임 반 급훈이 ‘약속을 지키자’라는 것이다. 친구들이 한결같이 빈정거리며 K를 힐난했다. 고3 학생들에게 그 따위 수준 낮은 급훈을 걸어 놓아서야 교육이 되겠냐는 거였다. 시대의 흐름을 못 읽는 K 같은 구닥다리를 교단에 머무르게 허락한 문교부나 교육위원회의 직무유기에 속으로는 분통이 터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대한민국을 하나의 거대한 학교에 비유해보자. 냉전시대 대한민국이라는 학교의 교훈은 아직도 우리들의 ‘의식의 방공호’에 남아있는 반공이었다. 5·6공을 지나 참여정부시대를 맞는 동안 우리는 무의식적이나마 정부가 내건 행동강령인 또 다른 교훈이나 급훈에 의해 일사분란, 조건반사적으로 움직여 왔던 것도 사실이다. 5·6공 시절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이 교훈이어서 ‘86 ·88을 잘 치르자는 데 이 따위로 하면 되겠느냐’고 큰 소리 한번 치면 공무원들이 낮은 포복자세를 취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엔 구호성 교훈이나 급훈들이 떠돌아다닌다. 다른 점이라면, 전에는 정부에 의해 조장이 되었던 것이 요즘은 사회 분위기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구조조정 강풍에 4학년 불혹(不惑)쯤 되면 학교를 조기 졸업해야 할 판이고, 더구나 학생받을 교실도 모자라 ‘재수 삼수 초등학생’들이 운동장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다.

 ‘2만 달러시대를 맞자’는 희망찬 메시지를 이마에 두르고 우리는 요즘 학교 운동장을 열심히 돌고 있다. 하지만 모두들 하나 같이 왼고개를 튼다. 이미 정해진 정책마저도 이리저리 뒤틀리고 백지장이 되어버리는 상황에서는 삶은 호박에 이 안 들어갈 소리라는 것이다. 툭하면 정치논리를 들이대고 이익집단의 힘겨루기에 밀려 내뱉은 말을 주워 담기도 바쁠 지경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전문가 행세지만 소위 여론 등쌀에 밀려 ‘진짜’는 입을 다물고 ‘짝퉁’만 날뛴다. 무늬만 전문가인 짝퉁들은 이해득실에 대한 저울질에는 능숙하지, 정작 필요로 하는 정책 대안이 없다. 그러다보니 아직 해결을 보지 못한 IT관련 현안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정부 정책은 기업과 국민에 대한‘약속’이다. 지켜지지 않는 약속은 불신만 초래한다. 실천이 담보되지 않은 약속은 무의미한 구호일 뿐이다. 정부가 약속한 대로 정책을 펴지 않으면 기업은 투자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개혁이냐 성장이냐가 아니라 정책 방향이 국민과 약속한 대로 제 길을 가고 있느냐는 점이다. 기업과 국민이 정부의 거짓말과 상황논리에 춤추는 조령모개식의 공약(空約)에 우롱당했던 일이 과거엔 비일비재했다. 참여정부 2기를 이끌어갈 국무총리도 지명됐다. 국회 동의 절차가 남아있긴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어려운 경제를 타개할 보다 근본적인 처방과 흔들림 없는 의지로 약속했던 정책들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한낱 초등학교 급훈 정도 밖에 안 되는 ‘약속을 지키자’라는 말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는 시절이다.

 <서용범 논설위원 yb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