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식당 중에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사람들의 입소문에 올라 있는 곳들이 많다. 천장에서 거미들이 줄을 치며 내려오고, 바퀴벌레가 어디엔가 숨어 있을 성 싶은 그런 칙칙한 식당 구석에 앉아 맛나게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야릇한 생각이 든다. 몇 년 전 언론에 보도됐지만 욕쟁이 할머니가 운영하는 어느 식당에서 제 돈 주고 걸쭉한 욕 한 바가지 얻어먹으면서 이를 쑤시며 나서는 이들을 보고 웃음이 났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어디 그뿐이랴. 그릇이라는 것도 일 년에 한 번은 닦아냈을까 말까, 시커먼 그을음이 더께처럼 붙은 찌그러진 양은냄비에 담긴 음식을 먹으면서도 불평은커녕 마치 ‘대장금’의 어린 장금이처럼 ‘절대 미각’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 표정들이라니…. 홀대와 구박을 받아가면서까지 맛의 희열을 느끼는 걸 보면 모두 매저키스트 같아 보인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한국전쟁 때 꿀꿀이죽을 담아 먹었음직한 찌그러진 양은 냄비에 라면을 끓여 파는 음식점들이 성업중이라고 한다. 라면 이름도 최루탄라면, 빨개면, 해장폭탄라면 등 듣기만 해도 살벌하고 자극적이다.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끓이면 소위 ‘돌비현상’이라는 것이 생겨 면이 잘 익는다. 부글부글 돌비 서라운드 음향을 내며 화끈하게 잘도 끓는 ‘돌비라면’ 국물은 사람들의 위장에서도 여전히 부글부글, 돌비현상을 일으키는 모양이다. 김유정의 소설을 보면 투계(鬪鷄)를 할 때 닭에게 고추장을 먹이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문을 모를 매운 맛에 얼얼해진 닭은 눈에 불을 켜고 갈기와 발톱을 세우고 상대방을 향해 저돌적으로 덤벼들게 된다. 매운 맛은 사람을 공격적으로 만든다. 어쨌든 양은냄비 라면이 유독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빨리 끓여내는 데서 오는 면발의 미묘한 질감 때문이겠지만, 진짜 이유는 냄비 통째로 라면 국물까지 먹는 독점적(?) 만족감 때문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빨리 끓고 빨리 식는’ 우리들의 체질을 빗대 ‘냄비’라고 꼬집은 냉소적인 사회 병리학적 진단이 있다.
얼마 전에는 난데없이 만두 때문에 난리를 겪었다. 광우병 파동으로 야단법석, 쇠고기는 평생 안 먹을 것처럼 맛난 갈비를 보고도 도리도리 하더니 이번엔 불량 만두소 때문에 홍역을 겪었다. 어쨌든 광우든 만두든 그 놈의 ‘소’가 문제인 모양이다. 이라크 파병, 행정 수도 이전 건도 속 터진 만두 꼴이 됐다. 춘투에서 이젠 하투(夏鬪)로, 멱살잡이에서 거친 입씨름으로 한판 겨루기의 연속이다. 그야말로 양은 냄비가 부글부글 끓어 넘친다. ‘쓰레기 만두’라는 무책임한 여론몰이에 몰매를 맞은 젊은 목숨이 한강에 던져졌다. 소위 ‘거리’가 걸리면 언론도 한몫 거든다. 사생결단 두들겨 패다가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갑자기 너무했던 거 아니냐는 식의 동정론을 편다. 두어 차례 만두 이야기를 하다가 식상하면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벌써 만두나 식재료에 대한 이야기는 시들해졌다). 이것으로 모든 상황은 유야무야다. 절대로 이 땅에 만두파동은 재현되지 않을 것이라는 가당치 않은 확신 하나로, ‘파동’을 파헤친 육하원칙 중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감시·감독의 시선마저 거두어버린다. 정말 그렇게 해도 안심이 되는지 모를 일이다.
디지털시대는 입보다 눈이 더 무서운 시대다. 이젠 모두 입은 닫아 걸고 조용히 눈을 뜨자. 그리고 살피자. 경제가 제대로 살아나고 있는지, 우리 살림이 좀 나아지려고 하는지, 미래가 걸려 있는 정책들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하여 우리 모두가 희망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는지를. 투박하고 못난 ‘뚝배기’로 된장찌개를 끓여 먹던 그 때 그 시절이 정말 그립다.
서용범논설위원@전자신문, yb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