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필자가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국민소득은 80달러도 안 되었다. 하지만 20여년 만에 1만달러를 달성하면서 우리 민족의 저력에 대한 세계 각국의 찬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 놀라운 성장저력도 지난 10여년간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해 우리 정부는 과학기술진흥을 위해 6조원 이상의 예산을 투입했으며, 그 중 정부출연연구소에서 약 2조6000억원의 예산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30여년간 해외 생활을 한 과학기술자 입장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가 과학기술분야의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선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우선 각 연구개발기관의 역할이 분명하게 정립돼야 한다. 국책연구기관은 원천기술 개발에, 그리고 민간기업은 상용화기술 개발에 투자를 집중해야 한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은 상용화 가능성은 높으나 기술개발 기간이 길고 상당한 규모의 개발비용이 소요돼 민간기업에서 추진키 어려운 기초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게 바람직하다. 하지만 현재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 연구기관들은 새로운 기술의 개발보다 원천기술의 도입에 의한 응용기술 개발에 주력하고 있는 모습이다.
물론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이 같은 움직임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실적 위주의 평가시스템에 의한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단기간의 기관 성과 창출을 위한 연구는 지양해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개발한 첨단기술의 테스트베드가 되어 기술의 상용화 시기를 단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를 통해 우리의 경쟁력을 얼마만큼 확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상용화를 원하는 외국의 원천기술과 우리의 기술이 어우러져 새로운 기술을 창출할 수 있다면 메모리 반도체, CDMA 이동전화, PDP·LCD 이후에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우리의 실정을 고려할 때, 먼저 외국기술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는 연구가 선행돼야 하며, 장기적으로는 우리가 보유한 원천기술을 상용화할 수 있는 연구개발 환경조성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목표한 대로 연구성과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연구과제에 대한 평가시스템이 정립돼야 한다. 연구성과가 수백쪽의 보고서에 그치고 말아 상용화를 위한 연구를 다시 하는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평가시스템의 문제에서 기인한다.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 상용화 과제 중심의 연구에 치중하고 국가적인 필요 기초기술의 개발에 역량을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단기 성과위주의 평가시스템 운영에서 연유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평가시스템은 기술성과의 발현보다는 연구예산의 집행과 과제의 공정성·중복성 여부의 점검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 같다. 연구결과에 대한 분석과 피드백 방안의 도출보다는 연구의 투명성 즉, 불합리한 예산 집행 여부를 파악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어 연구성과가 미흡해도 예산집행의 투명성만 보장되면 성공과제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함께 학연·지연 등의 복잡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어 공정한 평가에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과제 수행자가 예산집행기관의 평가를 담당함으로써 공정한 평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는 예산집행기관 및 평가기관의 분리와 아울러 연구진행 과정에 대한 모니터링시스템 구축, 평가기관 책임제 도입을 통한 부실 연구 방지, 연구개발예산에 평가비의 사전 반영, 어느 부처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된 평가기관 활용 등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같이 산·연 역할분담에 의한 원천 및 상용화 기술개발, 연구개발 과제에 대한 합리적 평가시스템 구축 등 성과중심의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동안 보여 주었던 우리의 저력이 발휘됨으로써 새로운 성장동력에 의한 세계 속의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유영수 송도테크노파크 원장 ysyou@step.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