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진정한 `山林`을 만나고 싶다

 산림(山林)은 산림지사(山林之士)·산림숙덕지사(山林宿德之士)·산림독서지사(山林讀書之士)의 준말이다. 또 다르게 임하독서지인(林下讀書之人)으로도 불린다. 벼슬을 하지 않고 향리에 은거하며 유유자적 책을 읽으며 소일하는 선비를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산골에 파묻혀 책만 읽다고 산림이라고 하지 않는다. 비록 과거를 안 보고 향촌에 은거하지만 뭇 선비들로부터 신망이 높아 나라의 여론 향방을 좌우하는 등 영향력이 커 임금도 함부로 어쩌지 못한 유림의 태두(泰斗), 즉 요즘 말로 표현하면 재야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다.

 산림의 원류는 고려 시대 무신의 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대체로 조선시대 연산군 무렵에 생겨난 산림학파에 기원을 두는 게 정설이다. 무오·갑자 등 네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사화로 인해 조선 중기 이후 많은 선비들은 산림에 은거하며 일생을 마쳤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삶의 기둥으로 잡았던 당시 선비들은, 난세의 흙탕물에 몸이 더럽혀질까 조신하며 벼슬자리에는 아예 눈도 돌리지 않고 후학 양성에만 몰두했다. 뜻있는 사람들이 벼슬에 나가지 않자 그 자리는 엉뚱하게도 권력에 눈이 먼 ‘짝퉁선비’와 돈으로 벼슬을 사려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갔다. 개인의 영달을 위한 권모술수에 능한 ‘짝퉁선비’들은 정승댁 식객으로 눌러 앉아 청지기를 통한 ‘줄대기 공사’, 즉 소위 새도우 캐비닛(shadow cabinet)에 끼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영의정 대감 바짓가랑이를 잡다가 여의치 않으면 이조좌랑 허리춤을 잡고 온갖 아첨 끝에 외관 말직 하나 얻다보니, 도처에 목민관이 아닌 ‘짜가사또’들이 판치게 되었는 데, 결국 이런 것들이 먼 후일 경술국치의 원인이 되었다. 옛말에 ‘잔디찰방’이라는 단어가 있다. 죽어서 무덤의 잔디를 지키는 소임을 맡은 찰방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권력 지향적인 성향을 빗댄 조롱이 아닐 수 없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를 맡길 큰 인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손바닥만한 나라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당파를 거론하다 보니 인물난은 더 심했던 것이다. 더구나 똑똑한 재목을 보면 꺾고 싶어 숫제 안달하다가 끝내 모함과 참소로 목숨까지 앗아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조선시대를 통 털어 너무 똑똑해서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사람은 아마 다산 정약용 한 사람뿐일 것이다. 만약 다산이 형장의 이슬이 되었더라면 우리는 그의 방대한 저술과 정신세계를 만나지 못 했을 것이다.

 독특한 사유와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재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정책에 반영해 제세위민에 힘쓴다면 그것만큼 국가를 위해 바람직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풍경은 그렇게 순진무구해 보이지 않아 안타깝기만 하다. 시인은 시를 쓰고 화가는 열심히 붓을 놀려야 한다. 연구원은 연구실에서, 교수는 강의실에서, 군인은 참호를 지켜야 한다. 언론인이 붓을 꺾고, 경제학자가 책을 던져버린 채 정치권을 찾으며 정치꾼 뺨치는 ‘줄대기 게임’에 빠져 있으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정치군인에, 정치시인에, 정치교수에, 정치기자… 우리에겐 이런 짝퉁에게 가졌던 불쾌한 기억이 남아있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말처럼 제 분수에 맞게 ‘다와야’ 한다. 과욕은 체신머리를 떨어뜨리고 자리를 위태롭게 하고 사회와 나라까지 망치게 한다. 어장이 망하려면 해파리들이 설친다는 속담이 문득 생각난다. 정말 이 땅엔 진정한 ‘산림’이 없는가. 자천 타천 로비가 판치는 이 세상에서 천연기념물 같은 꽃보다 아름다운 참사람을 만나고 싶다.

 서용범논설위원@전자신문, yb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