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기업용 솔루션의 대표주자인 전사자원관리(ERP) 업체들이 위기에 처했다. 수요부진에다 외산 업체들의 시장 공세까지 겹쳐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다. 그동안 중기 정보화 사업으로 국산 ERP 업계의 젖줄 역할을 해온 정부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이대로 간다면 몇몇 개별 업체의 도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산 업계 전체의 파산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가 높다. 한때 국산 기업용 솔루션 시장을 견인했던 ERP 업계가 벼랑 끝에 내몰린 원인과 대안을 긴급 점검해본다.
“중소기업들이 연초의 ERP 도입 계획을 줄줄이 늦추면서 수주 금액이 예년의 절반 수준을 밑돌고 있습니다. 그나마 꾸준히 판매돼온 1000만원대의 단품 모듈조차 이제는 수요가 없어 일손을 놓고 있는 상황입니다.”
국내 한 중견 ERP업체의 임원이 말하는 토종 ERP업체들의 경영 현주소다. 경기침체 여파로 중소기업이 지갑을 닫으면서 그동안 기업정보화의 선발주자로 부각됐던 ERP시장이 직격탄을 맞았다.
김종호 영림원소프트램 상무는 “예전에는 ERP 구축 비용의 경우 정해진 금액을 100% 현금으로 받았지만 요즘에는 가격 인하를 요구하고 어음으로 결제하겠다는 곳이 대부분”이라며 “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안 된다고 했을텐데 이거라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솔루션을 도입한 업체들이 경비절감 차원에서 유지보수료 인하를 요구해 3개월 정도 절감해주는 경우도 통례처럼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내 업체간 출혈경쟁도 늘고 있다. 남승주 더존다스 이사는 “업체들이 수주가 줄어들면서 원가 이하의 가격을 제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전체 프로젝트 가격의 절반 수준인 정부지원금만 가지고 구축을 하겠다는 업체들이 생기면서 시장 가격이 무너지고 있다”고 밝혔다.
ERP업체들은 실적 공개를 꺼리고 있으나 업계 전문가들은 실적이 좋은 상위 몇몇 업체만이 올해 상반기 작년 대비 80% 수준의 매출을 올렸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나머지 대부분의 업체들은 지난해의 절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적을 거뒀을 것이란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현재의 시장 상황이 지속된다면 군소업체들은 물론 중견 ERP업체들의 연쇄도산까지 거론하고 있다. 더욱이 다국적 솔루션 업체들이 국산 업체들의 주력 무대인 중소기업 공략에 적극 나서면서 ERP업계는 벼랑 끝에 내몰리는 위기에 처했다.
실제로 지난해 KAT시스템이 법정관리를 신청한 데 이어 올해 상반기에는 중견 ERP업체인 지앤텍이 사업을 접었다. 유일하게 외산 업체에 대응할 수 있는 업체로 거론되던 뉴소프트기술은 최근 인크루트에 인수된 뒤 ERP 사업 분야에 대한 비중을 줄이고 있다. 뉴소프트기술은 13일 주총을 열고 기존 장성익 사장이 퇴임, 정진산 CJ시스템즈 부사장이 대표이사로 선임된다.
SI 업체로는 드물게 국산 ERP에 의욕을 보였던 삼성SDS도 올해 초 ERP사업부문을 절반 규모로 축소했다. 지난해 상반기까지 130여명의 인력을 움직이던 코인텍은 현재 본사 인력을 30여명으로 대폭 줄였다. 또 별도의 영업인력이 분사해 현재 본사는 개발만 담당하고 있다.
주력 ERP솔루션에 대한 소스를 공개한 소프트파워 역시 핵심모듈을 만들겠다고 선언했지만 올해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의 3분의 2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전문ERP가 주력이던 케미스는 저작도구 판매로 주력방향을 선회했다.
이를 지켜보는 업체들은 내년 이후에도 사업을 지속하는 토종 ERP업체는 소수에 불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 같은 현상이 지속되면 토종 ERP업체 중 살아남을 업체는 불과 3개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결국은 기업정보화의 기반인 ERP시장을 외산 업체에 넘겨주는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윤대원기자@전자신문, yun1972@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