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국가R&D 파행’ 이래도 되나

 기초과학연구원의 국가핵융합연구개발(R&D)사업, 항공우주연구원의 우주센터건립 및 소형위성 발사체사업 등 중장기 대형 국가 R&D 프로젝트가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 프로젝트가 당초 계획과는 달리 추진 일정이 지연되고 대규모의 추가 예산을 필요로 하는 등 파행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토목 공사를 필요로 하는 대형 국가 프로젝트에서는 가끔 벌어지는 일이긴 하지만 국가 R&D사업에서까지 연구예산이나 일정이 고무줄처럼 늘어난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대형 국가 R&D 프로젝트가 주먹구구식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사업 기획과 집행을 사전에 조정하는 기능이 미흡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책 사업 타당성 여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중간 평가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발생한 것이며, 설령 문제점을 발견하더라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보도에 따르면 현재 추진되는 대형 R&D프로젝트들이 대부분 사업 계획 초기에 비해 예산이 최고 3배 정도 늘어났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부 사업은 올해가 목표 달성 연도임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겨우 시작단계에 들어간다고 있다고 한다. 물론 여러가지 이유로 연구가 늦어질 수는 있겠지만 연구 시작이 그것도 1∼2년씩 늦춰지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고 연구일정이 늘어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일정을 무시한 채 추진해도 상관없는 게 국책 과제인지 이해가 언뜻 가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아도 될 과제를 선정했다면 국가 R&D사업이 총체적으로 부실한 게 아닌가 하는 의아심마저 든다.

 국가 R&D사업의 일정 차질과 예산 증액이 불가피하게 된 원인이 예산 삭감과 과제 수행 책임자의 잦은 교체라는 현장의 볼멘소리도 수긍은 간다. 하지만 애당초 인프라 등 현실을 무시한 채 무리하게 과제를 수립한 것이 더 큰 화근이라 볼 수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돌출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명색이 거액이 투입되는 국책사업인데 중간 점검시스템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상황논리에 따라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인프라나 기초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척박한 풍토에서 넉넉하지 못한 예산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야 하는 과기계의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과기정책의 근간인 R&D사업이 목표한 일정 궤도를 벗어나 추진되는 것은 곤란하다.

 일부에서는 연구과제중심제도(PBS) 아래에서 연구원들이 살아남기 위해 일단 과제를 만들고 보자는 과욕이 이 같은 문제를 파생시켰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연구 성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연구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것이 방만하고 불완전한 관리시스템에 의해 생겨난 일인 만큼 국가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 R&D사업의 누수현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특정 기술이나 이슈에 대한 거시적인 안목을 지닌 전문가를 양성, 과제에 대한 사전심사를 강화하는 등 제도적인 보완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고 본다. 뿐만 아니라 진행중인 과제라 할지라도 사업 타당성을 엄정히 평가해, 문제가 있을 경우 과감하게 과제를 중단·퇴출시키는 정책 결정도 필요하다. 되지도 않을 사업에 막대한 예산만 투입하는 것은 혈세를 낭비함은 물론 국가 과기정책의 거시적인 틀을 만드는 데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