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사람들은 매우 빠르게 움직이면서 전자제품을 이용하는 유목민이 될 것이다.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지만 어디에도 집은 없을 것이다.” 30여년 전 캐나다의 미디어 연구가 마셜 맥루한이 내놓은 미래 예측이다. 김종래씨의 ‘CEO 징기스칸’이란 책을 보면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근교에 돌궐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수백년을 뛰어넘은 현자(賢者)들의 대화가 새삼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
우리나라를 보자. 수천 년 전에 몽골인의 피가 섞였는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이동성이 높고 생활자체가 휴대폰 문화로 바뀐 소위 ‘디지털 유목민’이 제일 많은 나라가 되었다. 요사이는 ‘e코리아’를 넘어서 ‘u코리아’ 건설을 위해 국가가 정책적으로 적극 추진하고 있다. 사람만 이동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물, 무생물 모두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끈’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간단하지만 엄청난 계획이다. 무선통신이 3세대까지 와서 주춤거리는 사이 유선통신에서 안주하던 초고속 인터넷이 이제 ‘끈’을 끊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지상파 DMB, 위성 DMB, 휴대인터넷, 게다가 4세대(차세대) 이동통신 등 모두가 같은 시간에 잠에서 깨어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통신 미디어를 통한 방송, 서로 대화하는 방송, 모두가 같이 참여하는 방송 등이 태어나면서 어쩌면 ‘통신방송’이라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할지도 모르게 되었다. 영어로 ‘컴캐스트(comcast)’ 정도로 쓸 수 있을지….
국가, 기업, 서비스사업자 모두가 전세계에서 거의 최초로 전개되는 끈 없는 통신방송에 대비해서 고심하고 있다. 표준화, 단말기 형태, 차량용 단말기와 휴대폰의 관계, 요금 책정, 새로운 기상천외한 콘텐츠 개발 등 모두가 새로운 숙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의 빠른 해결책이 동시에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어디로 가야 되는 것인가. 앞서가는 외국의 사례가 요즈음처럼 그리운 때가 없었다. 그러나 쫓아갈 앞선 사람이 없으니 그저 나 혼자 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난 몇 년을 돌아보자. 해답은 의외로 우리의 2, 3년 과거에 있을지도 모른다. 월드컵, 촛불시위, 대선 등에 불어 닥쳤던 새로운 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예전에는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돼 있었다. 근대에 와서는 한 사람의 권력을 견제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생겨나고 새로운 규율과 법이 그 권력을 대신하게 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새로이 생겨난 힘은 옛날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정보통신 기술이 가져다 준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 누구나 누구를 볼 수 있는 투명한 네트워크,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네트워크가 바로 새로운 권력을 만드는 핵심역할을 하는 것이다.
베일에 싸이고 무덤 속에 묻혀 있는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모든 네티즌이 참여하는 공동 대화의 장(場)인 인터넷은 새로운 감성의 응집을 가져왔고 이는 곧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큰 파도 같은 힘으로 기존의 형태들을 부수어 나가기 시작했다. 정보통신 기술은 짧은 시간에 참여와 감성을 사회시스템에 심어 우리나라를 크게 바꾸어 버렸다. 새로운 통신방송은 그래서 정보 제공이나 일방향 방송이 아닌 ‘감성과 참여’라는 두 개의 키워드를 갖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소수 그룹만의 닫혀진 모임, 내가 만드는 콘텐츠, 건전한 취미로 사이버 세계에서 만나는 기회, 그리고 이동하면서 짧은 시간에 즐길 수 있는 서비스, 원하는 동영상 정보의 실시간 제공 등등 수없이 많은 과제들이 감성과 참여라는 테두리 속에서 하나씩 풀려 나갈 것이다. 단말기 형태나 표준, 콘텐츠들도 그런 맥락에서 구상한다면 크게 벗어나지 않을 듯싶다.
이동하는 것을 아는 몽골은 800년 전 거의 전세계를 정복했고, 이제 세상은 디지털 유목민에게 그 기회를 다시 제공하고 있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의 ‘완전 개방’을 요구하고 있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정부도, 기업도, 국가도, 권력조차도 개방돼 출신이 어떻든, 부자나 가난한자나 장애자나 교육을 받은 자나 못 받은 자 모두가 함께 참여하는 세계의 디지털 선도국이 되는 꿈이 이루어질 날도 머지 않은 듯싶다.
<이상철 고려대 정보통신대학 석좌교수 leeph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