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가전시장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제품은 단연 에어컨이다. 온도계에 땀이 날 정도라는 이번 무더위 덕분에 에어컨 업계는 꽁꽁 얼어있던 소비자의 지갑을 여는 데 성공했다. 극심한 내수 침체 속에서도 에어컨 시장은 특수를 누린 셈이다.
생활필수품이 된 에어컨은 발명 당시만 해도 아주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온수가 들어있는 관으로 공기를 통과시켜 따뜻한 바람을 만드는 라디에이터의 원리에서 힌트를 얻어, 역으로 냉매를 통과시켜 차가운 바람을 만들어낸 것이 에어컨이다. 히터에서 얻은 에어컨 아이디어는 고정관념을 깨는 ‘패러다임 시프트’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인 아메리칸 풋볼의 경우도 에어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메리칸 풋볼은 영국의 럭비 풋볼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백 패스만 허용했던 럭비 풋볼의 룰을 깨고 전진패스도 허용, 경기를 더욱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게 만들었다. 결국 아메리칸 풋볼은 미국인들이 열광하는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로 발전했다. 작은 변화 하나가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최고의 스포츠를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 회사는 ‘5%는 불가능해도 30%는 가능하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얼핏 들으면 언어의 유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 역설적인 논리는 회사가 추구하는 혁신활동의 정신을 나타내는 동시에 방향까지 제시하는 말로 자주 인용된다. 5%를 개선하려면 지금보다도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나 어지간히 열심히 해서는 5%를 개선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그런데 30%가 가능하다고 한 것은 에어컨과 아메리칸 풋볼처럼 새로운 시각으로 ‘방법’을 바꿔 접근하면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결국 ‘30%는 가능하다’는 것은 패러다임 시프트를 강조하는 말인 것이다.
사실 어렵게 5% 개선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시장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전자산업의 경우, 특히 IT분야 사업은 매년 10% 이상 판매가격이 하락하는 어려움이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는 20% 이상 떨어지는 제품도 많다. 이러한 상황에선 땀 흘려 5%를 개선했다 해도 결국 마이너스 성장에 머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시장에서 10% 이상 판매가격이 떨어진다면 제조업체로서는 어차피 그 이상의 개선이 불가피하다. 원가구조를 개선하든 고부가가치의 프리미엄 시장을 개척하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고 5% 개선에만 연연한다면 변화하는 시장에서 경쟁도 조차 못해 보고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시장이 포화상태라느니, 사양산업이라느니 하는 평가절하 속에 냉대를 받아온 가전산업이 최근 디지털 컨버전스의 바람을 타고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TV·유무선 단말·각종 디지털 미디어와 결합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새 시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머지않아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급팽창하리라는 것이 국내외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디지털 컨버전스 시장은 얼마 전만 해도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던 공상과학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눈앞의 현실이 되어 또 하나의 시장으로 등장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시장을 선점하고 주도하는 것은 과거와는 다른 패러다임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요즘 우리 경제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시장은 존재하고 있고 또 새로운 시장도 만들어지고 있다. 디지털 컨버전스 시장이 그 대표적인 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이 새로운 시장에서 주인공이 돼야 한다. 떠오르는 시장에서도 주역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 경제의 앞날도 낙관하기 어렵다.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시장을 만들어가는 일. 그것은 패러다임을 바꿔야 가능해진다. 이 시점에서 다시 ‘패러다임 시프트’를 생각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우남균 LG전자 사장 namwoo@lg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