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칼럼]캥거루족과 안부전화

요즘엔 사업하는 친구들에게 안부전화 걸기도 겁이 난다. 극심한 불경기로 과민해진 탓인지 “별 일 없느냐”고 물으면 언짢다는 대꾸뿐이다. 전화기 저편 한숨 섞인 목소리를 듣다보면 공연히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입시철 고3 자녀를 둔 사람들에게 아이가 어느 학교에 입학했느냐고 묻는 게 실례인 것처럼 ‘사업 잘 되냐’는 물음이 상대에게는 꼭 “아직도 망하지 않고 잘 버티고 있느냐”는 일종의 사망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거시지표를 보면 우리 경제가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 하지만 서민은 갈수록 고달프다. 이는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을 더한 ‘불행지수(Misery Index)’가 지난 달 7.9로 급상승해 16개월 만에 최고치에 다다른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우리 국민의 경제적 상실감이 높아지고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고전소설 ‘흥보전(興甫傳)’을 보면 산아 제한에 실패한(?) 흥보가 사람은 태어날 때 다 제가 먹을 밥그릇을 가지고 난다며 다산에 대한 면피용 발언을 한다. 주걱에 붙은 밥풀을 뜯어먹던 흥보도 제비가 물고 온 ‘박씨 로또’에 당첨, 벼락부자가 되었으니 사람의 삶이라는 게 궁즉통(窮則通)인 모양이다. 하지만 설령 흥보의 말이 백번 옳다고 해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밥그릇을 만든 재질을 따져볼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누구는 부모 잘 만난 덕에 철밥통을 물려받았는가 하면, 또 누구는 지지리 복도 없어 누더기에 깡통 하나 달랑 유산이랍시고 받아들고 궁상을 떨고 있다.

 우스갯소리지만 당나라 때 시성 두보(杜甫)는 황제 곁에서 말직 벼슬아치로 몇 년 근무한 것을 빼면 평생을 ‘사발농사’를 짓고 살았다. 요즘 말로 하면 노숙자와 비슷한 처지지만, 제 홀몸도 아닌 가족까지 거느린 두보는 아주 배짱이 두둑하고 얼굴이 두꺼웠던 모양이다. 두보에게는 시 친구들이 많았는데, 제 나이보다 위로 10년 아래로 10년 폭넓은 교우 관계를 가졌다. 막강한 인적 네트워크 덕에 두보는 평생 직업이 없었으면서도 고종명할 때까지 밥은 굶지 않았다. 젊었을 땐 돈 잘 버는 선배에게 사발을 내밀고, 늙어서는 잘나가는 후배들에게 용돈을 타 생활비로 쓴 두보야말로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다는 측면에서 보면 요즘 유행어인 캥거루족의 원조가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 총선 때 정부 여당을 비롯한 산업 관련 부처들이 청년실업 해소를 위한 일자리 창출 정책과 투자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지만 상황이 풀리기는커녕 갈수록 뭔가 꼬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정쟁도 그렇지만 살인적인 국제 유가와 원자재 파동이 재현될 조짐을 보이는 등 외부적인 요인도 우리 경제의 주름살을 더 깊게 만들고 있다. 기업들의 ‘립싱크 투자’로 길에는 여전히 실업자가 넘쳐난다. 덕분에 요즘에는 생경한 종족인 ‘캥거루족’까지 생겨났다. 아예 취업을 포기한 채 부모에 의지해서 사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는 이야기다.

 “자네 아들 녀석 어디 좋은 데 취직 좀 했나?” 친구에게 가볍게 인사치레로 물은 말이다. 불황으로 도산해 벌써 ‘사망신고’하고 입관까지 끝냈다는 친구의 자조적인 대답에 맥이 풀린다.

 “이 사람아, 요즘 애들 취직 묻는 거 부모를 두 번 죽이는 거라는 사실 알기나 하고 묻는 거야? 이거야 원….”

  <서용범 논설위원 ybse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