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잠실벌에서 성화를 올린 서울올림픽은 ‘벽을 넘어서’라는 주제로 대한민국의 좋은 이미지를 세계에 각인시킨 지구촌의 이벤트였다. 당시 ‘벽을 넘어서’라는 주제를 대중 문화 속에 실제로 구현한 것은 올림픽 주제가였던 ‘손에 손잡고’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더욱 ‘벽을 넘고 손에 손을 잡아야’ 한다.
20세기에는 자본과 기술의 ‘독점적 소유’가 가능했지만,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콘텐츠가 상호 의존적인 21세기는 특정 자본과 기술이 시장을 독점하거나 산업의 조류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21세기 ‘열린 사회’에서는 자본과 기술의 협력, 이로 인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 곧 경쟁력이 되는 것이다. 혼자서 창조하고 혼자서 독점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과거에는 ‘기업 A와 기업 B 간의 경쟁’이던 것이, 지금은 ‘공급망 A와 공급망 B 간의 경쟁’으로 변하고 있다. 전통적인 마케팅은 제품을 중심으로 기업을 구성하였지만, 21세기 마케팅의 패러다임에서는 가치 사슬을 중심으로 구성되고 있다. 여기서 가치를 묶어주는 사슬이 바로 협업(Alliance)이다. 협업은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간에도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지역별 경제협업 체제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EU를 비롯하여 특정 국가 간에 체결되고 있는 FTA 등이 바로 그것이다.
글로벌 사회에서 국가 간의 협업, 특히 선진국과의 전방위적인 협업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해외 글로벌 기업들의 연구소 국내 유치사업은 ‘효율적 기술 교류·표준화 연대·생산 협력 확대’ 측면에서 매우 바람직한 정책이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볼 때도 협업은 파이를 키우는 효과가 있다. 즉 제로섬의 시대에서 탈피, 서로에게 도움을 주면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포지티브 섬(Positive Sum)의 시대를 개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비즈니스는 마치 ‘스스로 살아 숨쉬며 진화, 발전하는 유기체’와 흡사하다. 여러 사업 아이템을 묶어서 이전에는 없었던 비즈니스가 새롭게 창출된다. 이동 통신의 경우만 보더라도 통신사업자, 플랫폼 사업자, 콘텐츠 사업자 간에 협업이 잘 되어야만 경쟁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이 되고 있다.
HP 역시 협업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여러 가지의 이니셔티브를 취하는 회사다. 주지하다시피 CPU 개발은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되어 인텔의 경우, 매년 약 40억달러를 쏟아 붓고 있다. 그런데 새 CPU가 출시돼도 시장 지배 기간이 짧기 때문에 대형 글로벌 기업이라도 단독 투자 개발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이에 HP는 인텔사와 긴밀한 협업을 통하여 차세대 CPU를 꾸준히 개발함으로써 효과를 보고 있다. 싸고 품질 좋은 제품을 빨리 만들고 싶다면, 이제는 나 홀로가 아니라 여러 나라의 회사들과 협업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세계적 분업 체계가 이뤄지는 21세기에서는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는가(made in)’의 의미는 퇴색하고, ‘누가 만들었는가(made by)’가 중요하다. 이제는 ‘세계적 분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가치를 부여하기’가 새 시대의 화두가 된 것이다.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있는 것은 더 빨리 달리기 위해서다. 브레이크를 밟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다. 협업 역시 마찬가지다.
21세기의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 불변하는 것은 마켓과 그 마켓을 구성하는 고객뿐이다. 그리고 마켓도 역동적이고 다양화하고 있다. 협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양한 글로벌 고객 환경에 민첩하게 적응, 경쟁력을 높여야 할 것이다. 너와 나를 흑백으로 구분하는 양분법적인 사고로는 21세기엔 살아남을 수 없다. 너와 내가 손에 손 잡고 가는 길만이 개인과 기업, 그리고 국가가 상생, 번영하는 길이다.
<최준근 한국HP 사장 joon-keun.choi@h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