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e스포츠는 랜파티에서 시작됐다.
“BYC!(Bring Your Computer), only 20 bucks(컴퓨터를 가지고 와라, 단돈 20달러).”
미국 게이머들은 무거운 PC를 차에 싣고 행사장을 찾았다. 세계 최초의 게임 토너먼트가 자연발생하는 순간이었다.
지난 97년 시작돼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가던 랜파티는 우리나라에 상륙하지 못했다. 한국은 애초에 랜파티를 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동네마다 우후죽순처럼 새로 창업되는 PC방에서는 미국 랜파티 통신망의 거의 10배에서 더러는 50배 이상 빠른 속도의 인터넷이 365일, 24시간 돌아가고 있었다.
대신 한국에서도 토너먼트가 생겨났다. 미국에서 유행했던 ‘퀘이크’ 대신 ‘스타크래프트’를 소재로 소규모의 PC방 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게임대전 ‘붐’이 형성됐다. 우리나라에서 게임 리그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데는 미디어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99년 초 만화채널 투니버스에서 여러 프로그램 중 하나로 구성한 ‘스타크래프트 대회’는 예기치 않은 호응을 얻었다.
‘프로게이머’라 불리는 어린 선수들의 경기는 신기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하면서 마니아를 엄청난 속도로 흡수했다. 다른 미디어도 경쟁적으로 게임대회를 열기 시작하면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e스포츠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앞서 설명한 두 가지 e스포츠의 기원을 각각 ‘미국식’과 ‘한국식’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랜파티를 중심으로 성장한 미국식과 프로게임리그를 핵심으로 성장한 한국식은 비슷해 보이나 전혀 다른 양상을 지닌다.
미국식은 한 곳에 모인 게이머 사이의 문화, 즉 선수와 수용자가 전혀 구분되어 있지 않은 형태다. 마니아들이 스스로 토너먼트에 참여하고 관객이 된다는 뜻이다. 결국 미국식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토너먼트에 참여했는가’가 중요해진다. 바꿔 말하면 게임은 레저일 뿐 그것을 전업으로 하지 않는다는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다.
한국식은 어떤가. 탄생부터 한국식 e스포츠는 ‘콘텐츠성’을 그 기반으로 했다. 선수는 ‘프로게이머’로서 상품의 위치를 점했고, 다수의 관객·시청자·수용자가 게임 리그라는 콘텐츠를 향유하고 있다.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면서 시장이 확대되고 대기업은 그 마케팅력을 보고 투자하는 전형적인 ‘프로스포츠’의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대중에게 콘텐츠 상품성을 홍보하는 미디어가 강력하게 결합한 것도 또 하나의 특징이다. 결국 미국식과 한국식 e스포츠의 결정적인 차이는 프로냐 아마추어냐의 차이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미국식과 한국식은 끊임없이 성장하면서 그 모양새가 서로의 강점을 흡수, 조합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 랜파티의 대부격인 CPL(Cyber athlete Professional League)은 내년 매달 대회를 개최하며 전세계를 투어하겠노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미디어와 결합할 전망이다. 이는 끊임없는 자본과의 결합을 통해 프로화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등산 방법은 달라도 산 정상은 하나다. 미국식과 한국식 모델이 완성형에 가까워지고 있는 지금, 그것이 점점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도 정상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물론 두 모델의 산행 역시 한가로운 여정이 될 것 같지 않다. ‘세계 표준’의 주도권을 놓고 한판 대결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제 더 큰 시장을 바탕으로 성큼성큼 성장하고 있는 해외 e스포츠의 도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작 깨달았어야 한다. e스포츠 시장은 이제껏 시험기를 거쳐온 것뿐이고 골인 지점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엄청난 시장이 펼쳐져 있다는 것을.
<정일훈 게임캐스터 nouncer@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