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유통 교란하는 벌크 전자제품

 시중 유통상가에 최근 벌크·그레이 주변기기 유입이 늘고 있다고 한다. 벌크나 그레이형 전자제품이 시중에 나돈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PC 관련 제품을 중심으로 유입이 증가하면서 시장 질서 왜곡과 유통시장을 교란하고 있다니 걱정이다.

 대부분 중국·대만·인도 등지에서 들어오는 이들 벌크·그레이 주변기기들은 유통경로만 다를 뿐 정상적인 제품인데다 가격이 정상 수입제품보다 저렴해 인기를 끌면서 해당 제조업체 물론 정식 대리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실례로 일본 파이어니어의 16배속 DVD리코더(기록형 DVD) 벌크 제품의 경우 절반 값에 판매되고 있고, LG전자의 DVD리코더도 정상제품보다 4만원 이상 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벌크형태뿐만 아니라 그레이 제품까지 나돌고 있는 인텔 CPU, 맥스터·웨스턴디지털·시케이트의 HDD제품은 가격이 정식 수입품보다 1만∼2만원 낮은 값에 유통되는 실정이다. 아무리 벌크 제품이라도 전자파 검사만 받으면 법적인 하자가 없을 뿐더러 정품과 비교해도 성능 면에서 큰 차이가 없어 소비자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해당 업체와 공식 대리점들이 서둘러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어 더욱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외 대리점을 통한 역수입을 막기 위해 현지 딜러를 통제하는 것도 실효성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가격을 내리거나 AS로 차별화하는 맞대응 전략이 대안이겠지만 이 경우에도 불법 복제나 유사제품이 아닌 이들 제품을 막기엔 역부족이라는 게 업계의 고민이다.

 문제는 최근 벌크·그레이 주변기기 유입이 증가하는 이유가 자금난을 벗어나기 위해 속칭 카드깡이나 수입 신용장(L/C)을 이용해 할인하는 이른바 ‘L/C깡’을 하는 업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L/C깡의 만연은 장기 불황을 겪고 있는 우리 경제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된다. L/C깡 할인율이 통상 3∼4%였으나 최근 자금난에 허덕이는 업체들이 잇따라 L/C깡에 나서면서 할인율이 6%까지 치솟은 점은 벌크제품이 늘 수밖에 없음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물론 현금 및 판매력이 취약한 벤처나 중소 수입업체들이 경영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고육책으로 L/C깡 같은 편법을 동원하는 다급한 속사정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로 인한 주변기기 유통질서가 혼란스러워지고 이는 결국 정상 유통업체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벌크·그레이 제품 유입이 느는 것은 정품과의 가격 격차 등 구조적인 요인도 있지만 저가 벌크·그레이 제품이 범람하면 시장 질서 왜곡을 가져 올 수밖에 없다. 그만큼 벌크 그레이 제품의 범람은 그 누구에게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더욱이 가격 체계가 무너지면 유통가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감이 실추될 수밖에 없다. 너무 눈앞의 이익만 좇는 상거래 추세는 나중에 심각한 후유증을 야기할 수 있다. 시장 논리를 들이대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일부 유통업자의 자제를 요구하는 것도 이 같은 악영향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부실 AS에 따른 피해 방지 등 소비자의 권익보호와 유통질서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라도 이 같은 편법엔 세무조사 강화 등 일정 부분 제재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