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선택’의 홍수 시대다. 가령 원시시대에는 근처에서 눈에 띄는 동물은 무엇이건 잡아 동굴로 끌고 오면 저녁거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먹거리를 구해오는 일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슈퍼마켓에 가면 그 종류와 부위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육류 가운데서 뭘 선택하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산업계에서는 상품이 엄청나게 다양화돼 왔다. 60년대만 해도 국내에서 자동차를 선택할 수 있는 모델 범위는 고작 5∼6종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200종이 넘는다. 전자제품, 패션,생활용품, 방송채널 등의 분야에서는 더욱 심하다. 선택의 폭발이 일어난 것이다.
경쟁이 치열한 오늘날의 시장은 이런 선택에 의해 이끌려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택의 문제는 소비자들의 욕구 만족도와 직결된다. 단 한번의 실수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기업들이 화제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PC사업을 가볍게 본 IBM이나 뒤늦게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었던 삼성 등이 좋은 예다.
이른바 선택산업은 이런 배경을 두고 탄생했다. 먹거리 선택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된 인류는 어느날 문득 이를 다른 사람을 통해 해결하는 게 더 쉽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79년 니나와 팀 재거트가 세계 최초로 레스토랑 서베이를 만든 것은 이런 깨달음을 대변한다. 소비자들에게 세세한 상품 정보를 제공하는 컨슈머리포트나 컨슈머다이제스트의 탄생도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다.
정보시대인 요즘은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인터넷포털과 검색엔진 서비스들이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특허가 증가할수록 변리사들의 서비스는 다양해지고 새 뮤추얼펀드 상품이 나올 때마다 투자자들의 욕구는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소비자들의 만족도도 무한대로 커질 수 있을까. 소비 심리학자인 캐롤 무그의 답은 차라리 가혹할 정도다.
“선택의 다양화는 사람들의 욕구를 즉시 충족시켜 주지만 그 지적 수준은 유아적 단계에 머물게 한다.”
마케팅차원에서 보자면 이는 ‘소비자들이 더는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이고 싶어하지 않는’ 현상이다. 좁은 닭장 속에 갇혀 강제로 사료를 먹어야 하는 육계처럼 의사결정력을 잃고 만다는 것이다. 선택산업은 겉으로는 인류의 삶을 화려하게 치장해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서현진부장@전자신문, jsuh@